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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Ⅵ]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싱크로율


이충범 (협성대 교수, 중세교회사)


잘 알다시피 르네상스란 말은 부활, 부흥을 지칭하는 말로서 14-16세기에 걸쳐 서유럽 전반에 걸쳐 일어난 거대한 문예부흥의 사조를 말한다. 그리고 르네상스를 언급할 때 늘 따라오는 말들은 인문주의와 고전의 재발견, 도시의 발달, 상업혁명, 개인의 발견 등이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종교개혁이 발생하였고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작은 글 안에 위의 모든 복잡한 주제들을 압축할 재능이 필자에겐 없다. 그래서 필자는 본 소고를 통해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한다. 르네상스는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완벽하게 뒤집어놓았다. 그것을 그림 두 점을 보면서 실감해 보고자 한다. 


두 그림 모두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다. 첫 번째 그림은 필자가 아끼고 아끼는 도록에서 가져온 그림인데 중세시대 사치품 중 하나인 책 속에 들어가는 삽화이다.  9-10세기 카롤링거 시대에 아일랜드에서 그려진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면 성모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아기가 아니라 할아버지다. 그 주변을 4명의 천사들이 보위하고 있는데 천사들의 몸이 아기보다 작다. 우측 하단에는 6명의 제자들이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다. 그림 안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느낌은 전혀 알아내기 어렵다. 성모의 머리 위엔 커다란 아우라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그림은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란 그림이다. 15세기 말에 그려졌을 것으로 보는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한 백작가문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던 그림이다. 자애로운 성모의 표정과 안아주고 싶도록 토실토실한 아기,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관습대로 이마 위의 앞머리를 면도한 것과 심지어 고추까지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 이 두 그림을 가지고 몇 개의 질문을 만들어 보겠다.

질문1: 각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질문2: 두 그림 중 명암, 구도, 원근법이 사용된 그림은 어떤 것인가?
질문3: 등장인물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그림은 어떤 것인가?
질문4: 두 그림은 각각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중세에는 예술가의 이름이 없다.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세에는 그림이 그 어떤 사용처에 도구로서만 사용되었다. 또한 그림의 원근법이나 구도는 별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림은 책의 스토리나 주제를 보충 설명하는 역할에만 봉사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려진 인물들 역시 누군지, 몇 명인지만 중요할 뿐 등장인물의 사적감정은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중세시대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건 개인이 완벽하게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완벽하게 뒤집어놓는다.
르네상스 예술가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는 꼭 그 어떤 용도에 필요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부자들은 단지 그림 자체를 감상하기 위해서 벽에 그림을 걸어놓았다. 게다가 화가들은 등장인물에 대한 치밀하고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 인물을 화폭에 담았다. 배경도 마찬가지다. 원근법에 의한 정확한 라치오(ratio)를 화폭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자신들의 감정까지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개별적 인간과 화가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렇듯 르네상스는 전체 속에 묻혀 있는 개인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민중이니 하는 차원의 개인의 발견은 웨슬리와 칸트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럼 이제 이러한 르네상스의 특징을 종교개혁자에게 한번 적용해 보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이교도대전>을 보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13세기 성자 토마스의 책 중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항상 이런 식으로 등장한다. “신의 실존에 대한 첫 번째 반론에 대한 대답: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길,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첫 번째 반론은 오류이다(prima pars, art.3).” 여기엔 아우구스티누스가 없다. 단지 그가 남긴 문자들의 의미만 있을 뿐이고, 그 의미들은 성 토마스의 신학적 진술을 검증하기 위해 봉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가 만났던 하나님, 그가 체험했던 성령, 그가 느꼈던 엄청난 도덕적 회의 및 죄책감 등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신앙의 무의미한 단순 지성화 혹은 교리 변증의 완벽한 합리성에 봉사할 뿐이다. 성 토마스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는 용도가 분명했다. 그리스도교 집단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논리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매우 다르다. 그는 1532년 시편강해를 통해 강력한 어조로 죄의 심각성을 주장한다. 그는 단순히 회개를 교리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 역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었고,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 신학자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통렬히 자신의 무지와 죄를 간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을 인용한다. 우리는 ‘멸망을 받을 덩어리’이며 ‘우리가 이런 저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을 빌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간증한다. 또한 루터는 죄를 용서받는 것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또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죄는 세례를 받을 때 용서된다. 그러나 세례는 죄가 더 이상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라고 말한다.
성 토마스와 루터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는 전혀 다르다. 성 토마스의 읽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그의 저작은 성 토마스가 논증한 논제를 확인하는데 봉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루터의 읽기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고 또 루터도 있다. 루터는 자신이 직접 뼈저리게 체험하고 느꼈던 신앙의 체험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체험과 비교하고 있다. 성 토마스가 자신도 빠져있는 허무한 논증을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봉사하게 했다면 루터는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확인하기 위해 대교부의 고백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것은 위의 그림들이 보여줬던 사실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루터 이전까지 그리스도교엔 개인이 없었다. 아니 사회 전체에 개인이 없었다. 이 마을의 대장장이, 저 마을의 목수, 뒷마을의 제빵사만 있었을 뿐이다. 농노는 장원에 봉사하고, 기사는 영주에 봉사하고, 영주는 국왕에게 봉사하고, 국왕은 황제에게 봉사하고, 모든 이들은 성직자의 직업에 봉사할 따름이다. 12세기 아벨라르두스를 통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갔던 개인을 르네상스는 표면으로 끌어 올렸고, 루터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 회복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종교는 제사에 참여하는 종교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직접적 대면을 하는 종교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필자는 종교개혁을 성령의 민주화 과정의 발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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