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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 조직신학)

 

루터만큼 글을 많이 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평생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남겼다. 현재 남아 있는 루터의 1차 자료로 불리는 바이마르판(Weimarer Ausgabe)만 보더라도 총 8만 페이지에 달하니 가히 견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독일어 성서(1534)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글은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1520)이다. 초판 4천부가 불과 며칠 만에 팔렸고 같은 해에 87, 그 후로도 루터 생전에 열다섯 차례 판을 거듭하며 인쇄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루터 당시로만 국한한다면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1517)보다 이 문서가 훨씬 더 널리 알려졌고, 더 많은 사회적 이슈를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글에 담긴 내용에서 기인한다.

중세 교회론과 견주어 볼 때 가장 파격적인 면모가 바로 이 글 속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특별히 성직자에 대한 관점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가르침이었고, 이는 곧 개신교회 교회론의 핵심이 되었다. 가톨릭에서 한 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이다. 사도적 계승은 오직 주교의 안수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런 안수의 능력이 정면으로 거부된다. 사도적 계승이란 안수권에 있지 않고 오직 복음 선포의 직무만을 의미한다. 아마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신교는 주교의 안수가 아닌 교회 공동체를 통해 목회자를 선출할 수도 있고, 동시에 해임할 수도 있다. 이는 만인사제직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부터 직무를 위임받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목사의 운명이 갈린다. 즉 교회 공동체는 목회자를 세울 수도 있고, 해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직무는 계급이 아니라 기능적 분화일 뿐이다.

이런 사상은 루터의 다른 글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관하여(1520), 그리스도인의 모임 혹은 교회가 모든 교리를 판단하고 교사를 임명하거나 파면할 권한과 힘이 있다는 것, 성서에서 본 이유와 원인(1523), 공의회와 교회들에 관하여(1539)는 직접적인 증거 자료가 된다. 그리고 1523년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최초의 개신교 목사인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을 청빙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인사제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예를 잘 보여준다.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1520)으로 돌아가 보자. 이 논문의 근본 골자는 힘을 모아 교황을 탄핵하자는 데 있다. 루터에게 교회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교회 공동체가 원하면 목사는 선출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내쫓길 수도 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강력한 권한이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종교개혁 정신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 정신이다. 인용해 본다.

 

로마교도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성벽)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왔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들을 개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그리스도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왔다. 첫째로, 로마 교도들은 속권(俗權)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면 법령들을 만들어 속권은 그들에 대하여 아무 지배권도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권능이 속권 위에 있다고 말해왔다. 둘째로, 로마 교도들을 성서에 의거하여 책망하려 하면, 그들은 교황 외에는 아무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고 이론(異論)을 제기한다. 셋째로, 로마교도들이 공의회에 의하여 위협을 받으면 교황 외에는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답변을 한다. <In: 마르틴 루터,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1520)루터선집, 9, 141. ; 종교개혁 3대 논문, 28>

 

중심 논지를 요약하면 당시 교회가 너무 높은 벽을 쌓아 스스로 갇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장벽이 언급되는데, 우선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차별과 구별의 벽’(교회를 성직자가 다스리는 것이 신앙적인 일인가?), 다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지한 평신도가 해석하면 저주받는다는 평신도 성서 해석의 벽’(평신도에게는 말씀 해석의 권한이 없는가?), 마지막으로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공의회 소집권의 벽’(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가?)이 언급된다. 이 지적은 5백 년 전 사건으로 국한할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을 현대적으로 패러디해보자.

 

교단의 교권주의자(일부 주교, 감독, 총회장)들과 그 추종세력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성벽)을 쌓아 놓고, 그 뒤에 숨어 자신들을 방어해왔다. 그 때문에 이제껏 아무도 교회를 개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모든 교회에 무서운 전염병처럼 부패를 가득 차게 한 원인이 되어왔다. 첫째로, 교회의 지도자격인 이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문제를 지적당하면, 자기 맘대로 법을 만들어 외부에 있는 어떤 사회법이나 힘도 자기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고, 외려 자신들이 손에 쥐고 있는 주교권, 감독권, 총회장권, 목사의 영적권위가 사회법 위에 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둘째로, 이 자들은,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말씀과 그 정신에 따라 그들을 비판해도 아주 우습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영적 권위인 설교권은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반 신자들의 성서 해석과 문제제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셋째로, 교권주의자들과 그 추종세력들은 교단과 교회 공동체로부터 문제를 지적받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자들이 일어나 총회 소집을 요구하면, 교단 총회나 모든 회의 소집권은 자기에게 있으니 그 어떤 회의도 열 수 없다는 거짓말로 답변한다.

 

이 세 벽이 가진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권위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루터는 이 권위의 담이 교회의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꼬집는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은 성서 해석이나 교회 내부에 계급화 되어 버린 직분, 더 나아가 교황으로 상징되는 종교 기득권자의 독단적 행태에 저항할 것을 주장한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을 허물고,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살자는 개혁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신교인에게도 아주 파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 특별히 16세기 당시 교회와 사회를 들끓게 했던 가장 큰 문제는, 세 번째 벽으로 지적된 공의회 소집권에 관한 언급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나 감독 또는 교단 총회장이 직무를 게을리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 때, 교회 공동체는 공동 의회나 교단 총회를 통해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다른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담고 있기에 당시나 오늘이나 여전히 파격적인 내용이다.

루터 역시 이 글을 통해 교황을 끌어내리기 위해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나쁜 권위로 유지되고 있던 당시 교권과 교회 시스템에 대해 목숨 걸고 저항했다. 이것이 개신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는 만인사제직이 담고 있는 핵심 골자다. 5백 년 전의 글인데도 여전히 살아 있는 힘으로 읽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글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일관된 메시지 때문이다.

아무리 돈 많고, 잘 배우고, 건강하며, 영적 지위를 가진 목사나 교황이라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이고, 모든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여기서 루터교회 신학인 칭의론이 등장한다. 사람 위에 사람이 군림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평등한 존재다. 그러나 개혁의 후예라는 개신교회들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을 만들어 계급을 만들고, 교회를 높이 지어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고, 세상이 교회에 침범하지 못하게, 교인이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게 담을 쌓는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무셨고(2:14) 사도 바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8:28) 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교회는 여전히 담을 쌓아 우리만의 도성을 쌓고 있으며, 등록 교인과 종교 기득권자들, 줄 잘 서는 교회 정치 모리배들의 유익을 도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가죽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뒤엎듯 우리의 모든 담을 허무실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준엄한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고 저항하며 동참할 때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이 무너질 것이고, 구원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개혁 정신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부패한 로마 교황청에 대항해 제후들이 힘을 모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맞설 것을 주장한다. 이 주장의 역사적 근거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회의(325). 신학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교회의 직분은 기능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 모든 직분은 평등하며, 모든 성도는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만인사제론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은 후에 계몽주의와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가 된다. 이 논문은 권위의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 공동체가 소통을 통한 신앙의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즉 교회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이기에 성직자의 독점적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교황을 탄핵하자는 도발적 내용의 독일어 글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그로 인한 충격과 파장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하다.

개혁자가 역사의 유산으로 남긴 정신, 그것은 권위에 대한 믿음믿음에 대한 권위로 대체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명제에 충실했고, 그 충실함이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이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개신교인이라 부른다. 저항의 뜻을 가진 ‘protest’의 의미로 우리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른다. 이 복음 혁명의 동력, 이 진리가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개혁자가 외치는 만인사제직은 단순히 저항과 개김의 미학만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면을 보면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직분자, 더 나아가 신자들 모두가 사회적·공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가르친다. 즉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은 교회라는 담장 안에서 동등한 자유를 누리며 서로를 섬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신자라면 당연히 사회 안에서 공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개신교 신학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만인사제론에 담긴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름 받은 제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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