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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의 세월 - 김유동

성서와문화 2017.06.01 08:30 조회 수 : 3162

합창의 세월

 

김유동 (문화일보 편집위원)

 

내가 시온성 합창단에 들어간 것은 20대 초반의 일이다. 9.28 서울 수복 후, 폐허가 된 서울 거리가 조금씩 수복되어 가던 시절이다. ‘시온성을 이끈 분은 감리교신학교 이동일 교수이고, 반주는 작곡가 이영자씨가 맡았으며, 합창단의 위치는 정동교회 바로 곁,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시온성 합창단은 당시 흑인 영가로 성가를 날리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작곡가 박태준 선생님이 이끄는 합창단(‘오라토리오로 기억된다) 등도 활동하고 있었다.

우연히도 이계준 목사님은 부산 피난시절 시온성멤버셨으므로 나에게는 이 방면의 대선배이시다. 시온성 합창단은 HLKA(KBS의 전신) 방송합창단이기도 했다. HLKA 건물은 조선일보 새 건물 옆, 한때 원자력 병원이 되어 있던 곳이다. 스튜디오는 방송 시간이면 방음을 위해 문을 꼭꼭 닫아 놓는다. 에어컨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 한여름이면 스튜디오에 커다란 얼음 두 덩어리를 들여놓지만, 있으나 마나, 고문을 받듯 진땀을 비질비질 흘려야 했다.

시온성 합창단은 한때 용산 고등학교 앞에 있는 미군 부대 Camp Coiner 부속 교회의 성가대이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설교 시간이면, 우리 대원들은 이리저리 몸을 꼬며 그 지리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어느 날, 설교 시간에 성가곡집을 뒤적거리다, ‘궁창에서 찬양하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궁창(穹蒼)이라는 말은 높고 푸른 하늘이라는 뜻인데 창세기 17절에 나온다. 나는 그 궁창앞에다 자 하나를 써서 옆의 대원에게 슬쩍 보여 주었다. ‘시궁창에서 찬양하네가 된 그 가사를 보고 이 친구가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한 일이 있다.

우리가 미군 부대 위문 공연을 많이 갔는데, 어려웠던 그 시절, 그 부대에서는 푸짐한 저녁을 대접하곤 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는 스테이크, 수프, 빵은 물론이고, 식후에는 맛있는 케익,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 시절 이것은 대단한 호강이었다.

하루는 방송국으로 공문 하나가 왔다. 이화 여자 대학은 예배 때 성가대의 남성 파트를 맡을 사람이 없으므로, 방송합창단 남성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성가대를 도와 줄 수 없겠느냐는 제의였다. 교통비와 점심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남성 대원들은 기꺼이 봉사하기로 했고, 그 뒤로부터는 주일마다 예배 후 여자 멤버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고, 야유회를 가기도 했다. 교인도 아닌 나에게는 이름난 목사님들의 훌륭한 설교를 듣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이화여대 부총장이던 박마리아 여사의 부군 이기붕 권사님(당시 국회의장)도 가끔 경호원을 대동하고 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곤 했으므로, 훗날, 그 가정의 집단 자살 소식은 남의 일 같지 않은 큰 충격이었다.

당시 서울시립 교향악단은 연말만 되면, 으레 베토벤의 교향곡 제9 번을 연주하곤 했다. 여기 나오는 합창을 위해 음악 애호가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며, 나는 이렇게 ‘9심포니를 불러야 또 한해가 가는구나 실감하곤 했다. 당시는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사례는 없고, 연주가 끝나고 나면, 사직동에 있는 시향(市響) 건물로 가서, 간단한 다과 파티와 기념 배지를 받는 것이 모두였다. 조금 늦게 온 멤버들은 다과가 다 떨어진 테이블 앞에서 젓가락과 이쑤시개를 들고 씩 웃곤 했다.

나는 명동의 시공관에서 상연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 출연한 일도 있다. 이 오페라의 합창에는 방송 합창단, 명동 성당과 이화여대 성가대원이 주로 참여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시공관무대 뒤 분장실에 들어가 출연 준비를 하게 되었다. 꽤 너른 공간 양쪽 벽에는 거울이 죽 붙어 있고, 군대의 내무반처럼 양쪽으로 앉을 곳이 만들어져 있다. 겨울철이었으므로 난방을 위해, 분장실 양쪽 끝에 커다란 가마 하나씩을 놓고 숯불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숯불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대에 나가자면 무대 화장을 해야 한다. 먼저 살색 도란(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코가 오똑하게, 눈이 크게 보이기 위해 코 양쪽과 눈 언저리에 어두운 색으로 그늘을 만들고, 볼은 약간 붉게 칠하고 나서 번들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파우더를 살짝 뿌린다. 하지만... 분장사가 두세 명밖에 없는지라 그 많은 합창단원을 모두 돌보아 줄 수는 없다. 여자 멤버들은 평소의 화장 솜씨를 발휘해 그럴싸하게 화장을 한다. 우리 남자는? 여자 대원의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다. 합창단원은 회중, 밀수꾼(산적?) 등의 역할을 하므로 머리에 야릇한 헝겊을 두르고 의상도 얄궂게 차려입는다. 무대에 나가기 전 한 아가씨가 외친다. ‘오늘, 우리 애인이 구경하러 오거든. 그러니까 무대에서 나한테 친한 체하지 마’.

그 날의 주인공 카르멘은 이화여대 성가대 지휘자인 이영애 씨였다. 돈 호세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문득 낯익은 나를 보았다. 나를 안다는 친근한 몸짓을 한다. 이건 대본에 없는 동작이다. 프리마돈나에게 쌀쌀맞게 못 본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때만큼은 센스 있게 가벼이 알은체를 할 밖에. 이영애 씨는 나중에 무대 감독 오화섭 씨에게 꾸중을 들었다. 이튿날, 분장실로 당시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가 오셨다. 웃으며 하신 말씀은 이랬다. ‘나는 외국에서 오페라를 많이 보았지만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담배를 가지고 나가지 않기를 바라요’. 한 여자 대원이 멋지게 담배를 꼬나물었던 모양이다.

우리 합창대원으로서는 골치아픈 장면이 하나 있었다. 연이어 세 번이나 오케스트라가 전조(轉調)를 한 다음 남자들이 보아라, 온다, 우리의 알칼대!’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장면인데, 아마추어가 보아라의 첫 음정을 제대로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되면, 음악 감독인 당시 명동성당 성가대 지휘자 홍연택 씨가 무대 옆에 와서 피리 같은 도구를 불어 음정을 잡아 준다.

세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던 무렵 TV라는 것이 나왔다. RCA에서는 TV를 팔아야겠는데, TV 방송국이라는 것이 없는 거다. 그래서 종로 보신각 바로 곁 건물 4 층에 HLKZ라는 방송국이 벼락치기로 생겼다. 이 곳 합창 역시 우리 시온성이 맡았다. 이곳은 큰 스튜디오가 하나 있을 뿐인데, 스튜디오에 바로 붙어 있는 화장실에서는 스튜디오로 지린내가 지독하게 피어 나왔다. TV 조명은 뜻밖에도 그 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에어컨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방송국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우리의 고생도 끝이 났다.

HLKAKBS로 바뀌었다. 합창단도 아마추어 아닌 음대 출신으로 바뀌고,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던 이남수씨가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 KBS도 남산 중턱으로 이사하고, 우리는 방송국에서 물러났다. 젊은 시절, 정신적인 위안을 받으며 열정을 쏟을 수 있어 행복했던 합창시절을 접고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반 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당시에 비해 볼 때 엄청 달라졌다. 세계의 이름난 연주가와 오케스트라가 으리으리한 홀에서 연주회를 열고, 웬만한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에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살며, 문화인답게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 있다. 정치계만큼은 분리수거가 되지 않아 시궁창 같은 느낌을 주지만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그들을 분노어린 시선으로 서글프게 바라보는 요즈음이다.

80이 넘은 나는 순발력,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신감도 사그러진 이 나이에, 아직도 주일이면 성가대 봉사를 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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