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7년 성서와 문화

()과 선()의 대결과 대화

 

장기홍 (경북대 명예교수, 지질학)

 

 

2. 전쟁악(戰爭惡)

전쟁에는 침략전젱 곧 약탈전쟁이 있고 그것에 대항하는 국방전쟁이 있다. 어느 경우거나 승리를 목표로 하고, 살상(殺傷)을 포함하는 갖은 악한 방법을 다 쓴다. 그러므로 전쟁은 일반적으로 악한 것이지만 침략이 있으면 국방이 필요하다. 옛날부터 어떤 인류교사(人類敎師)라도 침략과 약탈에 대비하는 싸움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절대 비전론(非戰論)은 아무도 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00) 같은 위대한 철인은 전쟁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갈파했다. 대립에서 투쟁이 나오는데 투쟁의 극치인 전쟁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공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면 그의 말은 ()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뜻이 된다. 전쟁은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하는관계에 놓이는데 이 관계는 산 자가 피할 수 없는 법칙이다. 가차없이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형편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만 하면 전쟁악(戰爭惡)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전투가 벌어진 최전방의 현실은 그 교훈을 거부한다. ()이 비록 형이요 동생인 경우라도 부대장(전투지휘자)이 뒤에서 왜 쏘지 않느냐?”고 호령을 하며 총을 겨누고 있다.

 

3. 악의 기원(起源)

6억 년 전, 초기동물인 에디아카라 동물군()’은 마치 식물처럼 퇴적물 속의 양분을 흡수하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해치는 법을 몰랐으므로 그들의 사회는 에디아카라 낙원(樂園)’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들은 진화의 역사에서 번영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 그런데, 5.4억 년 전 캄브리아기 초에 생겨난 무척추동물 무리는 놀라운 진화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개체수()와 종류가 급증(急增)하는 폭발적 진화를 보였기로 학자들은 이를 캄브리아기 폭발(Cambrain Explosion)이라 일컫는다. 이때의 특기사항은 포식(捕食)류의 출현이다. 포식이란 제가 살기 위해 남을 잡아먹고 사는 먹이 방식으로, 그것이 바로 포식악(捕食惡)의 출현이다.

자기 영양(營養)을 위해 남의 몸을 약탈하려면 행동이 민첩해야 하므로 운동기관이 발달했고, 희생자를 노려보기 위해서는 눈이 발달했고, 운동기관, 신경계통 등을 통괄(統括)하는 뇌의 발달을 향한 진화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가속적(加速的) 진화는 경쟁과 투쟁이 없던 에디아카라 동물류의 침체(沈滯)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살해(殺害)하는 포식악()은 그것이 바로 생물진화상의 악의 기원이며 그 원악(原惡)은 바로 그것이 원죄(原罪)에 해당한다고 필자는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육식(肉食)을 하면서 포식악(捕食惡)을 경험하지만 모두들 그것이 자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선악의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다. 자연이라는 이유로 포식행위에 대해 도덕적 조명을 하려 들지 않는다.

포식(捕食)을 영어로는 ‘predation’이라 하고 침략, 제국주의 등 약탈행위는 ‘depredation’이라고 한다. 포식악(捕食惡)과 전쟁악(戰爭惡)을 일련(一連)의 것으로 보았던 사람들의 언어의 묘미이다. 인간은 캄브리아기 동물의 후손이므로 포식(捕食)이라는 강도질의 출현에서 인간의 모든 약탈행위의 기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자기를 위해 남을 먹게 되므로 악()의 바탕에는 자아(自我)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불교와 자이나교의 신도들은 육식을 삼가는 극기(克己)를 행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남을 잡아먹고 자기 삶을 유지시키는 삶의 먹이사슬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안다.

전쟁이라는 약탈행위는 반성을 요한다. 우리는 하루 속히 민족이나 종족집단의 극기의 도덕을 살려 전쟁을 삼가는 세계평화의 시대가 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야만적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합리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4. 조물주의 생명사업: ()이 선()이 되게 한다

필자는 앞에서 선()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악은 생명을 해치는 일이라 했다. 그렇다면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사실을 두고 생각해 보자. 그 죽이는 일은 악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통해 생물계와 인류는 삶이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은 결국 선()이 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00)전쟁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갈파했다. 전쟁은 악이 최대한으로 발동하는 때이므로 그의 말은 악이 만물의 어머니란 뜻이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은 무력행사였지만 역사에 진보를 가져왔으므로 그를 모두들 대왕(大王)이라고 한다.

쿠데타는 무력으로 하는 반역행위이지만 새로운 왕조는 대개 쿠데타로 시작되며 무장(武將)이 태조(太祖)가 된다. 살상을 수반하는 무력(武力)행사가 새 역사를 여는 것은 상식이 되어 있다. 잘못된 신왕조도 있겠지만 신왕조는 대개 역사에 진보를 가져왔다.

인도에서는 지속(持續)의 신 비슈누(Vishnu)보다 쇄신의 신 시바(Siva)가 더 인기가 있음을 나는 현지에서 보았다.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크리슈나는 시바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진다. 무력행사 자체는 악이지만 역사의 경신에는 무력이 주효하다. 조물주의 생명사업을 보면 그는 선악을 함께 구사하며 악()이 선()이 되게도 한다. 그래서 선과 악의 대화라 말해보았다. 사도 바울은 합동하여 유익이 된다고 했다.

천적(天敵)이 우글거리는 경쟁적 투쟁적 분위기라야 산 자(生者)는 활기를 띤다. 천적이 없으면 해이(解弛)해지는 까닭에 활성(活性)을 띠기 위해 악()과 겨루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악과 거짓이 주위에 널려 있을 때 사람들은 평화와 진리의 사도가 될 자각(自覺)을 얻는다. 이것이 조물주가 사람을 사도(使徒)로 부리는 방법이다.

사람 안에 있는 싸움의 의지(意志)를 진리탐구와 정의실현에 쓰도록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싸움의 본능을 극복하고 이웃사랑의 의지로 전용할 때 우리는 그만큼 세계평화에 다가설 것이다. 세계평화는 이미 진행 중임이 사실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오랜 관찰의 결과 뉴기니아의 원시인 집단들은 1931년 이전에는 서로 만나면 싸우기부터 했으나 그 후 그것을 지양하고 지금은 낯선 종족에 대한 선량(善良)의 관행과 제도를 마련했다고 회고했다(어제까지의 세계, 2013, 김영사). 곳곳에 테러가 날뛰고 폭음이 요란하지만 온 세상이 차츰 평화를 향해가는 걸음은 더디지만 진행 중이다.

 

5. 예수의 선린관(善隣觀)

군사동맹은 악행(惡行)일 때가 많다. 삼국시대를 돌아다보면 신라는 백제·왜 동맹(同盟)의 잦은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구원요청에 따라 5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왜와 백제의 군사를 물리쳐 주었다(AD 400, 광개토대왕비). 그런데 그 후 신라는 당()과 동맹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은 한반도를 다 집어삼킬 심산(心算)이었으므로 신라는 나당(羅唐)전쟁을 해서 겨우 살아났다.

2000년 전 로마제국 아래 신음하던 유대인들은 광복과 안보(安保)가 큰 과제였다. 일단유사시에, 인접한 사마리아인들이 적()일지 아니면 우방일지를 두고 의문이 있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두고 한 유대인은 예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우방(友邦))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에서 서로 자비(慈悲)와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 그들은 서로 이웃이라고, 그의 선린(善隣)관 곧 도덕적 우방(友邦)관을 피력했다. 일본의 일부 정치가들은 한일(韓日)이 서로 적대관계임을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있으나, 일본이 지진·쓰나미 등 재해를 당했을 때 원조물자를 보내 선린관계를 확인하곤 하는 한국민의 선린(善隣)관을 보면 우리는 서로 우방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첫머리는 강도의 출현이다. 지진이나 쓰나미도 강도와 같은 것이다. 그처럼 악이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구도(構圖)는 기원전 800년경의 최초의 교조(敎祖) 조로아스터의 관점(觀點)이기도 하다. 그레그와르 교수의 도덕사상사(日語 번역, 1956)에 의하면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은 예수의 고향 팔레스타인에 예수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먼저 악신(惡神)이 공세를 취하면 선신(善神)이 방어에 나서는데, 그 때 인간이 선신을 도와 악을 물리쳐서 선()이 승리한다는 구도(構圖)이다.

조물주가 악을 만들어 구사했다고 보던 옛 기독교 일파는 일찍이 이단으로 몰려 배척되었지만, 우리가 현실을 관찰할 때 조물주가 생명의 활성화를 위해 악을 구사하는 사실은 너무나 뚜렷하다. 그이는 체면을 구겨가면서 몸소 악을 창조·구사했으니 그것이 그의 최선(最善)이었다. 필자는 이것이 조화주(造化主)의 희생정신이었다고 생각해본다. 악을 두어 산 것들이 서로 천적(天敵)이 되게 장치함으로써 생명(生命) 속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 아닌가? 조물주는 스스로 절대선(絶對善) 혹은 최고선의 자리를 내어놓는 희생을 감수했음이 아닌가!

사랑과 자비를 공유하는 도덕적 우방(友邦)의 이상이 실현될 때 인류는 세계평화에 다가설 것이다. 개인이 악한 욕망을 억제하는 극기(克己)를 하듯이 민족과 집단도 사랑을 위해 자아를 극복하는 수준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의식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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