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7년 성서와 문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서 나왔다. 애초에는 모두 다 몰랐던 것인데 차차 하나씩 알게 되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라고 이름 붙은 고갱의 그림은 보스턴 박물관에 있다. 이것은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이고 그래서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끌을 잡고 망치로 때려서 조각을 만드는데 다음 순간 어디를 어떻게 깎게 될지는 정말 나도 모른다. ‘내일 이렇게 할 것이다하고 마음먹었지만 자고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렇게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과 확실하게 모르는 것 두 가지 상이한 조건을 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성이 하는 일과 감성이 하는 일은 또 달랐다. 감성이 하는 일은 종잡을 수가 없다. 같은 내 머릿속에서 생기는 현상인데 왜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내가 서른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바깥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석고와 시멘트를 섞어서 형태를 만들고 있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내가 미술대학에 들어가서 만든 첫 번째 작품 얼굴조각부터 시작해서 그날까지 15년간 만든 모든 작품들이 한 줄로 순서대로 늘어서는 것을 본 것이다. 찰나에 생긴 일이었다. 대부분 없어진 형상들인데 또렷또렷하게 영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잊어버린 형상들이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왜 별안간 만든 순서대로 나타났는가. 그것도 한 찰나에 말이다. 순서대로 줄을 서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시간이 없는 찰나에 그런 일이 생겼으니 이런 일을 설명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지 모르겠다. 황홀하단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통쾌하단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그 이름할 수 없는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순간에 전체를 본다. 전체라는 말 속에는 사상과 감정과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어쨌든 한목에 파악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누가 그림을 이해하려든다면 그림의 진면목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림을 이해하려고들 한다. 피카소가 그랬다. ‘당신네들은 저 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새들의 말을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 새들의 소리를 다들 좋아한다. 만약에 어떤 화가가 설명하는 언어로 그림을 만들었다고 하자. 보는 사람이 그 설명하는 바를 알아들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이 하는 묘미에서는 한참 벗어난 일일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이 이해한다고 될 일인가. 까마귀 나는 보리밭거기에는 참 그림의 감격이 있을 뿐이지 해설을 붙이자면 감격은 도망가고 빈 그릇만 남는다. 그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 보는 것이다.

감격이라는 차원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가. 또 이해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내가 평생을 예술이란 것을 업으로 삼고 살았는데 감사한 것은 미지의 것과 하루 종일 상대했다는 그것이다. 아는 것과도 상대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과 놀았다는 것이었다.

천당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한다. 아무도 보고 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도교 말고도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고대 사회에서도 각종의 생각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한량없이 많다. 우리 인류가 지금껏 찾아 안다고 하는 세계는 한강에 모래알 하나만큼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우주에 끝이 있는가 하는 것 하고,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 하고,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정말 깜깜한 것이다. 요한복음 서두에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일은 내가 찾아서 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닌 성싶다. 그 분이 나한테 와서 보여 주어야 되는 일 같다.

내가 못 본 것은 다 없는 것인가. 나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못 본 것은 다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을 요렇게 고쳐야지 하고 작업실에 내려가 보면 전혀 사정이 달라진다. 몇 분 후에 내 작품이 어떻게 달라질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못 본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든지 많이 벌어지고 있다. 화가들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살고 있다. 화가가 노년이 되면 앎의 차원을 벗어나서 부지(不知)의 세계와 가까워진다. 거기에 예술가의 집이 있다. 그 미지(未知)의 땅이 예술가의 고향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정확한 답을 내기가 어려운 일 같다. 작품은 끝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없이 찾아 헤맨다. 오직 진행이 있을 뿐이다. 종착역이 없다. 그렇다고 허망한 것은 아니다. 화가에게는 그리는 기쁨이 있다. 갈수록 기쁨의 양()이 증대한다. 하루 종일 기쁨의 시간 속에 있을 수 있다. 예술과 종교의 만남은 필연인 것 같다. 하느님은 기쁨이시다. 예술의 기쁨과 종교의 기쁨이 두 가지 일 리가 없다. 큰 기쁨 작은 기쁨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한울타리일 것 같다.

진리를 터득할 때에는 기쁨이 따른다. 내가 쉰이 되던 해에 두 가지 알 수 없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찰나에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너무나도 환한 답이 왔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찰나에 그런 일이 생기는지. 천천히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순간보다도 더 짧은 찰나에 그랬다. 내가 찾아 얻은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었다. 은총이란 말이 그래서 생긴 것 같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그런 걸 보면 저 쪽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곳은 빛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빛은 사랑이고 동시에 기쁨이었다.

예술가의 마음은 무한한 세계로, 영원한 세계로 열려있다. 사랑이라는 것과 기쁨이라는 게 분명히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는 명료하게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 안에 있고 무한 속에 있지만 영원과 무한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 사랑 ? 기쁨 ? 아름다움 모두가 신비의 세계이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아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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