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하여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선교학)
서양의 전통교육에서 수사학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수사학은 단순히 말의 기술을 연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 즉 인문학의 중요한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모름지기 학자란 외떨어진 공간에서 문자와 홀로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광장에 모인 대중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설득력 있는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말의 ‘장소성placeness’, 곧 누가, 어디에서 말하느냐가 말의 내용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는 건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가 그것이다. 로고스가 말의 이성과 논리를 가리킨다면, 파토스는 공감과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측면을 가리킨다. 윤리학ethics의 어원이기도 한 에토스ethos는,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그가 속한 시대의 풍조를 지칭한다. 논리력와 공감력, 그리고 발화자의 인격에 대한 청중의 신뢰가 골고루 균형을 갖춰야 말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된다. 로고스와 파토스, 에토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거나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 말은 공허한 울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말의 훈련을 중시하는 경향은 서양의 현대 사상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언어의 성사』에서 “시원적 형태의 독신(瀆神)은 하나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무신론자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안 계신 것처럼 사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신에 대한 근원적 부정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아감벤의 지적에 따른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는 이들은, 말과 앎과 삶의 불가분리성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살며, 사는 대로 또 알게 되는, 말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해 감히 말하려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한 줌의 진실일 테다.
설교는 말의 연금술이라고 한다. 설교자는 마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인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시대 설교자들의 말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앎이 모자라서도, 말의 기술이 부족해서도, 열정이 없어서도 아니다. 말과 앎과 삶을 하나로 단단히 묶어주던 그 무엇, 즉 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건 아는 것이고, 말은 말이고, 사는 건 또 사는 것이라는 영민한 생활의 기술이, 투박한 ‘참말’ 대신 미끄러운 ‘빈말’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강단을 길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과 위로가 필요한 시대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헛된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말이 아니다. 우리시대는 ‘참말’에 목마르다. 말과 앎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이 하나인 사람의 말, 자기가 자기 말의 주인이고자 애쓰는 사람의 말이라야 언어는 성사(聖事)가 된다. 옳은 말이 아니라, 옳은 사람의 말이 궁핍한 시대다.
* 이 글은 <기독교타임즈>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