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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기독교 (7) - 천주교에 대한 중국의 반응

 

 

안경덕 (몽골 선교사, 경영학)

 

 

[개요]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고유한 상황에 적응하는 하향식 선교를 기본전략으로 삼아, 1583년부터 중국 본토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보다 앞서 천주교는 원나라 세조 때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주로 몽골황실과 동방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한 활동이었고,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서민학자[紳士]관료황실 등은 계층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서민층, 즉 하층의 지방 유지들과 이들의 영향권에 있는 촌민들의 반응이 중요하지만 이들의 실상에 대한 연구가 없어서 설명하기 어렵다.

먼저 지식층의 반응이다. 개종자의 숫자는 극히 적었지만, 선교적 역할이 대단히 컸고, 개종하지는 않았더라도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에 관심을 둔 신사들도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거나 관심을 보였더라도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고 거부감을 보였다. 특히 선교사들이 집중 공격하였던 불승과 거사들의 거부감이 가장 컸다.

또 관료층의 반응을 보면, 유교적 전통의례가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으므로(이는 나중에 전례논쟁과 금교령의 단초가 된다), 관리들은 재량권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지방에서는 관리들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경교안이 대표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와 궁정의 반응을 살펴보면, 통치상의 필요에 따라 역법이나 군사기술을 통한 선교사들과의 접촉 문호는 명청 교체기에 상당히 넓게 열려있었고, 따라서 선교사들은 이를 이용하여 제한적이나마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일부 중국인의 호감이나 관심은 선교의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선교단체 내부의 갈등과 반목까지 겹쳐서 금교령(1724)과 전례논쟁을 부르고 역사적으로 실패한 선교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개종자의 성격] 선교초기 중국의 기독교인 숫자를 보면, 리치가 죽었을 때(1610) 2,500(북경에 400), 남경교안(1616) 때에는 6,000명 안팎, 역옥(1664) 때에는 100,000명 안팎, 그리고 천주교가 가장 흥성했던 1700년대 초라고 해도 200,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인구가 1억을 넘은 때였으므로, 고작 0.2%가 교인이었던 셈이다. 물론 기독교인 대부분은 서민들로 문맹이었고 여성이 절대다수였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신사층을 선교의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신사층의 총인구대비 비율은 0.5% 정도였으나, 기독교인의 0.85%가 신사층이어서, ‘위로부터의 선교방침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기독교인의 지역적, 계층적 성격을 선교방침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예수회 초기의 선교사들은 불교의 선교방식과는 달리, 치밀한 전술을 가지고 출발하여, 황제가 있는 북경을 최종목적지로 삼았으며, 또 복건절강성과 북경 인근산서성 등 당시 중국의 문화산업의 중심지를 지방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선교에서 신사층, 특히 관직경력자[]와의 관계가 중요시되었는데, ‘관계가 있는 관직자들이 임지를 바꾸면 선교거점도 바뀌거나 확장되는 이동성이란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층의 정착성과 이동성이란 특성과 예수회의 선교전략이 맞물려 명말청초 기독교인 공동체가 지역기반을 강화하면서 전국적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사층의 반응]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문화에의 적응방침(언어생활양식예절복식 등의 철저한 중국화), 하향식 선교방침(지식층관리 등에 대한 우선적 선교), 유럽의 과학과 기술의 전수를 통한 간접 선교, 중국사상에 대한 개방과 수용(원시 유교에서 신의 개념 발견, 조상과 공자에 대한 제사)을 선교방침으로 채택하여 중국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기독교의 중국선교, 나아가서는 근대 동서양의 교류에 크나큰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실제로 청나라 초에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궁정에서 봉사하였고 이들을 통하여 사회지배층, 특히 신사층에 대한 선교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아갔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신사들 가운데 일부 지방에서 극소수만이 반응을 보였는데, 이들을 기독교교 이해나 접근 동기에 따라, 봉교사인(奉敎士人), 용교사인(容敎士人), 반교사인(反敎士人)으로 구분할 수 있다. 봉교사인이란 자진하여 기독교인이 되어 선교에 기여한 사대부들로, 기독교와 학문 모두를 수용한 인물, 또 기독교만을 수용한 인물로 나눌 수 있으나 대부분은 보유적(補儒的)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것으로 본다. 용교사인은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서학을 수용한 사대부들인데, 명말청초에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서양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인데 이들의 존재를 따로 부각하여 선교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반교사인] 그렇다면 반교사인은 누구인가? 리치는 불교, 도교를 이단시하였고 송학[後儒]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리치는 공격을 불교에 집중하였는데, 이러한 역불적인 자세 때문에 유교개혁파들이 기독교에 공감하고 동정하게 되었다. 반대로 리치의 이러한 자세는 거사를 포함하는 반교사인들과 불승들로부터 비판과 논란을 부르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과 배척의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또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 중국의 문명과 접목되는 과정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천문역법을 독점하다시피한 선교사들에 대하여 중국의 수구정통세력은 극심한 적대적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게는 기독교는 물론 이것과 함께 중국에 유입된 서양의 과학기술조차도 자신들의 사활이 걸린,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절박한 이유로 반교사인이라고 통칭되는 수구세력들은 봉교사인이나 용교사인에 비하여 기독교에 대한 반대논리와 명분을 찾는 데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삼교연합세력은 마침내 반기독교 정서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 힘을 합하게 되었고 이것은 기독교 박해사건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다음에는 두 번에 걸쳐 17세기 대표적 기독교 박해사건인 남경교안역국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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