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7년 성서와 문화

 미(美)를 찾는 길가에서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시골 사는 한 제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용건을 마치고 내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 작품 본지가 오래됐는데 어쩐 일이냐” 그가 대답하기를 “속에서 푹 익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기에 ”작품은 일 하면서 익는 것이다.” 그랬다. 전화를 끊고 났는데 문득 라이나 마리아 릴케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능금나무 열매는 쉬면서 익는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멋있게 말을 골랐을까. 조각가 아르프는 또 이렇게 말했다. “닭이 알을 낳듯이 형태는 낳는 것이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형태들이 익는 소리가 들려오는 날, 나는 그런 날을 기다릴 것이다. 형태는 일 하면서 익는 것이다. “모란이 뚝뚝 떨어지는 날,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이게 무슨 소리 인지는 몰라도 어릴 때 읽은 김영란의 시 한 구절이 잊히지 않는 것은 또 무슨 때문일까.
   시인은 시를 낳고 화가는 그림을 낳는다. 사람마다 그 작품이 다른 것은 사람마다 먹은 게 다르고 그 새김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파랑새는 파란열매를 먹었고 빨강새는 빨간 열매를 먹었다는 동요 말처럼 세상천지에 하고 많은 먹을 것 중에서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에 천 사람이 천 가지 형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고 오묘하다. 만 가지 꽃이 피는 자연의 이치를 내 어찌 다 알겠는가.
   좋은 것을 먹었으면 좋은 사람이 됐을 것이고 나쁜 것을 먹었으면 나쁜 사람이 됐을 것이었다. 경주 박물관 마당에 에밀레종이 있는데 나는 옛날에 그 종을 한 번 때려본 일이 있었다. 너무도 놀라서 평생을 잊을 수가 없다. 보통 종소리는 귀로 들리는 것인데 에밀레종은 가슴으로 울리는 것이었다. 어찌나 길게 울리든지 숨을 참느라고 혼이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종 허리에 글을 써 놓았는데 이러이러하게 울려서 세상 평화에 기여하여 지이다하는 염원의 글이 있었다. 만든 이의 간절한 마음이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빅토르 위고가 저 유명한 레미제라블을 써 놓고서 앞에다가 서문을 썼는데 “이와 같이 불쌍한 일이 이 세상에 있는 한 나의 소설은 영원토록 읽힐 것이다.” 내가 읽은 책에는 앞에 짤막한 시를 적고 있었다.

          인생의 문제는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무엇인가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내가 나이 들어 이 시(詩)를 다시금 음미 하는데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싸우는 것이고, 이겨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잘 죽어야 하는 것. 인생(人生)이라 제(題)한 짤막한 시에다 이 소설 전체의 내용을 함축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싸워야했다. 내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술사와 싸워야했다. 일만 년 인류가 이룩한 정신적 가치를 모두 아울러서 내가 주인이 돼야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마음은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 이겨서 승리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그림예술이란 것이다. 진정한 그림 안에는 싸워서 다 이겨낸 「승리의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죽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존재는 없다. 우리들의 삶은 단 한 번뿐이고 절대로 예외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인생은 무상하다. 자연도 무상하다. “연못가에 봄풀이 아직 단잠을 깨기도 전에 뜰 앞에 오동나무 잎은 가을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음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피할 길이 없는 그것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 최대의 문제가 있다. 아름답게 늙는 것.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6.25 전쟁이 막 휴전이 됐을 때이고 서울은 지금의 서울이 아니었다. 어려운 게 참 많았든 시절이었다. 어떤 책을 펼쳤는데 눈에 딱 들어오는 글귀가 하나 있었다. “공부 하는 가운데에 먹을 것이 있다.” 아마 공자의 말씀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그 한마디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크게 위로를 얻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말. 공부하는 가운데에 먹을 것이 있다! 뜻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직감으로 온 것이었다. 칼보다도 더 예리하고 무서운 힘이 있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만사가 물거품과 같이 보일 때 여래(如來)를 만난다. 山中水復 疑無路 柳暗花明 又一村.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산 너머에 밝은 세상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말씀들을 가슴 속 깊은 데에다 담고서 긴 세월동안을 새기며 살아왔다.
   빛으로부터 왔고 빛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오직 사람만이 살아서 빛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빛은 완전한 기쁨의 세계이다. 모든 생명이 빛으로부터 왔고 참 구원이란 다시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술가는 무의식으로 빛을 감지한다. 그림 안에는 기쁨이라는 존재(存在)가 있는데 사람들은 본능적 감각으로 그것과 친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술의 바탕은 빛이다. 생명의 원천, 인간의 고향, 예술가의 마음은 그곳을 그리워한다. 영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예술가는 그런 길 어떤 골목에서 두리번거린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린다.
   암스테르담 박물관에는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소녀상 그림이 걸려있다. 페르메르의 「진주귀걸이 한 소녀」 그림이다. 한 번은 박물관 책방에서 책을 고르다가 그 소녀상 얼굴이 표지에 가득 찬 책을 사온 일이 있었다. 그 깨끗하고 신선한 표정이 마음에 드는 때문이다. 서울에다 그 한 점을 갖다 놓으면 아마도 인산인해(人山人海)일 것이다. 어떤 친구가 런던을 다녀와서 하는 얘기가 모딜리아니 전시회가 있었는데 유독 거기에만 관중이 줄을 섰더라는 것이었다. 일찍 죽은데다가 그림 수도 얼마 되지 않은 화가인데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어떤 기막힌 매력이 있는 것이다. 서울에는 자코메티의 조각전이 열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서 또 동시에 영국에서 전시회가 크게 열렸다. 왜 이 시점에 자코메티의 형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가. 지난 세기 100년, 소외당한 인간존재에 대한 애련함에 어떤 일깨움이 작용하는 까닭이 아니었을까.
    와글와글 시끄럽고 혼탁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이 없다. 누가 한 말이던가.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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