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7년 성서와 문화

‘가사 그리기’와 마드리갈

 

 

김순배 (한세대 겸임교수, 음악)

 

 

르네상스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가 능했던 기법중 하나가 ‘musica reservata’이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예약된 음악’인데 음악 속에 가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같은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이 되어있다는 뜻을 갖는다. 비슷한 의미로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가 있다. 오늘날 온갖 종류의 음악에 길들여지고 가사의 의미가 과장된 노래들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귀에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중세의 오랜 기간 동안 감정이 들어가거나 개인적인 정서가 투영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던 교회음악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에 조스캥의 ‘가사그리기’는 결정적 영향이었다. 그는 라틴어로 된 종교적 내용의 모테트에서도 가사 그리기를 시도했고 세속노래인 프랑스어 샹송에서도 생생한 묘사를 즐겨 사용했다. 르네상스 샹송은 여느 시대 세속노래가 그렇듯 풍자적 요소, 사랑노래, 전원풍 자연 묘사가 그 주된 내용이다.

 

르네상스 말기 기악음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음악사는 성악음악이 주류를 이루는데 가사와 음악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교회의 의전용으로 쓰인 라틴어 가사는 일반인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와도 같았다. 중세의 모테트는 각 성부에 다른 내용의 가사가 붙여졌다. 일관된 내용의 전달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형태다. 세속노래가 교회음악 못지않게 쏟아져 나오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 하며 노래에서 가사는 매우 중요해졌다. 조스캥의 ‘가사그리기’ 기법에 자극을 받고 활성화된 음악과 가사의 밀접한 관계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반에 확산된다. 마침내 르네상스 후반 16세기의 100년간을 통해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마드리갈(madrigal)에 이르러 가사와 음악은 밀착의 정점을 보여준다. 마드리갈은 독창이나 합창이 주를 이루던 그때까지의 관행을 깨며 넷 혹은 다섯 명의 작은 그룹이 부르던 중창 앙상블이다. 사교모임이나 취미활동으로 매우 적합한 형태여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과 섬나라 영국에까지 그 파장을 미친 세속노래의 결정판이 마드리갈이다.

 

마드리갈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 왔기에 흔히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처음에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출발했지만 중기로 접어들면서 극적 효과에 대한 실험이 대담해진다. 이 시기 작곡가 마렌치오가 페트라르카의 시에 붙인 ‘홀로 생각에 잠겨’(Solo e pensoso) 같은 곡은 산, 바다, 강 같은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면서 숨을 곳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의 우울함을 묘사한 곡으로 뛰어나다. 가사의 내용에 맞춘 굴곡진 선율과 대담한 화성 진행 각 성부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섬세한 정서를 표현한다. 마드리갈 진화의 절정은 말기의 제슈알도에 이르러 펼쳐진다. 베노사 왕국의 왕위계승자였던 카를로 제슈알도는 아내의 부정을 목격하고 그녀를 죽인 살인자였지만 왕족이었기에 처형을 면한 후 오직 마드리갈 작곡에만 온 열정을 쏟는다. 그는 가사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기법으로 유명하다. 난해한 화음, 빈번한 불협화음, 지나치게 높은 음역과 낮은 음역을 순식간에 오가는 방식은 제슈알도 마드리갈의 특징이 된다. 이같이 시대를 앞서가는 제슈알도는 ‘16세기의 바그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6세기를 풍미했던 이탈리아의 다성부 노래 형식 마드리갈은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영국 마드리갈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원동력이 된다. 더불어 마드리갈의 성행은 바로 이어져 오는 1600년의 바로크 시대를 맞아 탄생하는 오페라를 위한 단단한 초석의 역할을 해준다. 마드리갈은 가사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는 선율, 화성, 리듬의 조합으로 극적인 효과를 마음껏 추구했다. 그 기운을 이어받은 새로운 세기, 본격 음악 드라마인 오페라의 출발이 가능했던 데에는 르네상스 마드리갈의 공헌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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