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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기독교 5]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 (1)


안경덕 (몽골 선교사, 경영학)


  1-4회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두 차례(당나라와 원나라 때)나 중국 땅을 밟았던 동방교회(경교)와, 그러한 종교적 접촉을 통해 십자군 시대를 전후하여 유럽인들이 동방의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단편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 우선 가톨릭의 중국선교에 관해 몇 차례 맥을 짚어보겠다.

  십자군 전쟁(1095-1291) 이후 지중해 남부인 북아프리카와 서부인 소아시아 이동지역은 무슬림이 지배하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으로 정교회의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유럽 북부는 종교개혁(1517)으로 가톨릭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 기독교 왕국의 지배자 교황청은 북동남 세 방향은 차단된 채 라틴국가들을 중심으로 서쪽에서만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가톨릭에게 활로를 열어준 것이 바로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1492)과 포르투갈의 인도항로 개척(1498~99)이었다.
   중세 가톨릭은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주장을 기초로, 선교를 “교회의 자기실현” 즉 교회의 본질로 보고, 따라서 기독교 왕국[교회]의 보호와 확장은 세속권력[국가]의 가장 중대한 의무로 정당화하였다. 또 아퀴나스(Aquinas, 1225?~1274)에 이르러서는 신앙과 이성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하여 “열등한 본성”을 가진 피식민자들의 강제 개종을 가톨릭 선교신학의 기본으로 삼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러한 해석은 식민화와 선교를 동일시하면서 교황에게 선교의 독점권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가 1534년에 설립하였는데, 가톨릭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대표적 수도회로 트렌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하여 가톨릭의 내부적 모순에 대한 반성(이를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과 신학적 지향을 바로 세우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면서, 가톨릭 선교의 첨병이 되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개신교와의 분리를 공식화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예수회는 초기에 예수회의 창업동지인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의 주도로 인도와 일본 선교의 문부터 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토착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면서 top-down 방식의 선교를 하였는데 이들의 신학적 훈련과 선교준비는 철저한 것으로 역사적 정평이 나있다. 예수회는 중국에서, 정복지인 남미에서와는 달리, 서양의 진보된 과학문물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과 발전된 문명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선교전략을 구사하였고, 따라서 유럽에서 최고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예수회는 마카오에 근거를 마련하고 1535년부터 59 차례나 50 명의 선교사들을 중국 본토로 파송하려고 노력하다가  반세기 뒤인 1583년 루기에리(Michele Ruggieri, 1543~1607)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를 파송하게 된다. 그 뒤 중국선교는 1631년까지 50여 년간 포르투갈 선교권(교황은 대서양상의 아조레스 군도를 기점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서쪽을 스페인에게 선교권을 주었다-지도 참조) 밑에서 예수회가 독점하게 된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사도 바울 이후 최대의 선교사라고도 하는 리치는 이탈리아 중부 마체라타에 태어나서 피렌체, 로마와 코임브라에서 신학과 수학교육을 받은 철저한 르네상스인이었다. 1583년 9월 10일 자오칭에 자리를 잡은 리치는 승복 차림의 종교인으로 행세하면서 지극히 제한적이고도 조심스런 활동을 하였으나 6년 뒤 새 총독에게 건물을 빼앗기고 나서, 1589년 사오조우로 옮겨가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동료 둘을 잃고,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594년 그는 중국 지식인을 상대로 하는 구체적인 선교방책으로 유럽의 과학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세계지도(山海輿地全圖)를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복색도 승복에서 유자의 것으로 갈아입고 중국의 사인(지식층)들과 접촉을 넓혀나갔다. 준비를 끝낸 리치는 남경을 거쳐,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여 중국 전체를 교화(복음화)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채, 드디어 1595년 5월 31일 황제가 거처하는 북경에 오게 된다. 그러나 리치는 1610년 5월 11일 선종시까지 15년 동안, 일종의 인질 신세로, 북경을 떠나지 못하였고, 황제도 배알하지 못하였다.
  리치의 15년 북경 생활은 중국선교사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또 바꿀 수 없는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시기였다. 또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선교의 근본 과제, 즉 위로부터의 선교냐, 아래로부터의 선교냐 하는 우선접촉대상의 문제, 적응주의 선교에 대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톨릭 내부의 주도권 문제와 결부되어 예수회가 해산되고, 중국에 금교령이 내리는 단초가 된다.) 예수회 선교의 기본전략인 “적응”은 비단 리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주의와 원리주의가 판치는 오늘날 한국 선교의 문제이며, 또 복음의 순수성을 양보불가의 전유물로 만들어 신자들을 포로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에 근본주의자들이 막연히 강조하는 “순수한 복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데, 사도 바울조차도 복음을 로마제국에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적인 사고틀을 활용하였고, 어거스틴, 칼뱅이나 웨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복음서가 여럿인 것도 여러 각도에서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도록 성서의 편집자들이 크게 배려한 것이리라.) 리치의 적응주의를 이해하려면 그의 노작 『천주실의』를 반드시 읽어보아야만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고대사상과 기독교의 복음을 연결하여 확장하려는 참다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송영배 역, 천주실의, 서울대출판부, 1999) (다음 회는 “리치의 적응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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