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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정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철학

 

양명수 (이화여대 교수, 기독교윤리학)

 

성서는 처음부터 정치와 관련이 많은 책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출애굽기에서 파라오 권력에 대한 히브리 노예들의 반란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왕권이 세워질 때의 사무엘과 하나님의 대화는 중요한 정치사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 나라란 세상 나라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분리되지 않으나 구분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구분은 서양의 정치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서양에 준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가 나라에 대한 비판 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 권력과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국가를 죄의 산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국가는 원래 하나님이 원치 않던 공동체인데, 타락한 인간들에게 질서가 필요하여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인정했다. 국가는 안으로 통치 권력이 형성되어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강제력을 가지고 질서를 잡는다. 밖으로는 다른 국가와 힘의 대결을 통한 전쟁의 위협 속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국가 형태를 하나님이 본래 뜻하지 않았던 공동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형태의 사회가 국가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그 안에서 정치가들의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지만, 본성적으로 정치적 존재는 아니라는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처음부터 남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정치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은, 이해관계의 충돌을 강제력으로 조정하고 신체를 구속하는 정치집단으로서의 국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던진 것이다.

이러한 정치철학은 국가를 최고의 공동체로 본 동서양의 인문주의자들과 다르다. 서양의 인문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공동체로 보았다. 인간은 시민이 되어 공공선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큰 선을 이룬다고 보았다. 동양의 인문주의자 공자와 맹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국가는 최고 목표요, 국가에 봉사하는 것만큼 명예로운 것은 없다. 사심을 버리고 공심을 가지라고 할 때, 공심이란 국가에 이바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는 국가 권력을 비신성화하고, 국가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어떤 정치형태도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서양의 근대에 이르러 사회계약론으로 구체화된다. 국민주권과 사회계약론의 뿌리를 거슬러 가면 성서의 정신이 있고, 초대 교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국가 비판이 있다. 물론 인간이 국가를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국가 질서를 중시한다. 국가가 만드는 법질서에 복종하는 게 중요하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어디까지나 죄인들에게 불가피한 공동체이다.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이 소유욕과 지배욕에 의한 끝없는 투쟁으로 가지 않고 잠정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죄인들 사이에서 그런 국가가 불가피하므로 하나님은 국가를 당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적 섭리(providentia voluntaria)라고 했다. 그러나 자연적 섭리(providentia naturae)에는 어긋나는 것이니, 본래 하나님이 바랐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명령과 복종의 질서가 있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바라신다. 그것은 세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 나라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은 세상 나라의 개혁을 낳는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더 정의롭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 때문에 서구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실험을 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 체제를 향해 인류 역사는 진보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를 통해 자기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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