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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문화: 호모 쿨투루스와 예수 그리스도

 

손호현 (연세대 교수, 문화신학)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무엇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요? ‘생각하는(sapiens) 인간’, ‘놀이하는(ludens) 인간’, 혹은 보다 최근의 경제적(economicus) 인간등등 우리의 본질을 규정하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적 인간’(homo culturus)이 그것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문화라는 뜻입니다.

문화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는 보다 분명히 드러납니다. 원래 문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쿨투라(cultura)’쟁기질하다, 땅을 경작하다(colo)’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합니다. 성서에 따르면 최초의 아담(‘에서 유래한 인간의 이름)이 에덴동산에서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9)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유예(猶豫)의 기간 동안 인간은 흙을 일구고 경작하고 노동하는 문화적 사명을 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단지 외부적 환경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 자체에 대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로마의 대문장가 키케로(Cicero)철학은 영혼의 경작이다(cultura animi philosophia est).”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화에 대한 생각들은 인간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문화의 경작 과정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놓인 유예적 존재 곧 호모 쿨투루스입니다.

문화는 이처럼 인간에게만 허락된 특권일지도 모릅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 Plato)은 동물도 뛰어다니며 춤추고 놀이하는 듯 보이지만, 그러한 과정에서도 그것들이 지닌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 오직 인간은 이러한 예술적 과정 속에서 그것이 지닌 영원한 리듬과 멜로디를 깨닫는다고 보았습니다. 동물에게 우리가 예술적 능력 혹은 미학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재한 반면, 오직 신과 인간에게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우리에게 자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이러한 예술의 능력을 부여하였다고 합니다(법률653d-654a). 따라서 오직 인간만이 문화적 교육이 가능하고, 문화적 인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참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문화적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경작해가야 하는 최종 목표는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참 인간이 되기 위한 유예의 시간을 허락받은 존재이며, 참 인간이 되어가는 문화적 과제가 어쩌면 가장 인간으로서 독특한 점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참 인간이 누구인지 자연적으로 알 수는 없으며, 진정한 인간의 참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났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사실 그저 태어나면서 주어진 어떤 자연적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참 인간되시는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 Christi)을 통해 이루어가는 일종의 예술작업의 목표입니다. 소금(素琴) 유동식 선생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러한 예술작업 곧 동양의 미학에서 말하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의 삶이라는 모습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정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과정이 바로 성육신의 모범을 모방하는 인생의 과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형상은 모방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에서 온전히 표현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참 인간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피하고 싶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굴욕과 고통의 모습입니다. 삶의 모든 유쾌함과 좋은 것들을 다 잃어버린 가난한 인간 자체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가 예언한 이러한 외적 추함이 수난 받는 종의 진정한 내면적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하였습니다. 13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제7대 수도원장이었던 보나벤투라(St. Bonaventure)는 거룩한 가난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겸비”(humilitas Dei)를 드러내는 하방(下方)의 내려오심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이러한 자발적 가난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흙이 되신 것보다 더 가난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의 흙을 가난함의 쟁기를 들고 경작하여 참 아름다움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가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난을 복되게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 가난했고, 삶에서 더욱 가난했고, 십자가에서 가장 가난했다.”고 보나벤투라는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최고의 예술(ars suprema), 성부의 예술(ars Patris)”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흙을 갈아가는 문화행동 곧 자신을 끝없이 일구어가는 예술활동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가난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가난이라는 지난한 수행의 과정을 생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영적 스승 프란체스코를 평생 본받아 살아갔던 보나벤투라는 성찰은 오직 가장 높은 단순함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장 높은 단순함은 오직 가장 높은 가난함을 제외하고는 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동양에서도 배움이란 잃음을 통한 완성, 곧 가난함의 성취라고 보았습니다. “배움은 날로 더함이요, 도는 날로 덞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라고 도덕경48장은 말합니다. 문화 곧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이상은 이러한 거룩한 가난의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농사가 씨알을 흙에 뿌려도 항상 그 운명은 하늘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진정 하늘만이 농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농부 하나님이 우리라는 인생의 흙에 씨 뿌리고 쟁기질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 하고 단순해져야 하고 거룩한 가난에 도달해야 합니다. 인생은 일종의 삶의 농사 과정입니다. 세계의 소음 속에서 흙의 고요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참 인간 곧 호모 쿨투루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쟁기질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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