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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와 나라사랑 (2)] 가문의 별을 넘어 민족의 별이 된 리효덕 
                                                  
                                                      고성은 (광리교회 목사, 교회사)


  평창 리씨 가문에서 유독 빛나는 별 하나가 출현하였다. 그 별의 이름은 리효덕(李孝德)이었다. 그녀는 갑오경장이 한창 전개되던 때인 1895년 1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율하리 17번지, 한 평범한 농부인 부친 리인수와 모친 박성일 사이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이처럼 평범한 가정 속에서 출생한 그녀의 인생을 밝혀 줄 ‘등대’의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였다. 그녀의 출생을 기점으로 집안이 날로 가세가 늘어난 가운데 온 집안 식구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특히 모친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성이 그녀를 남다른 삶으로 이끌었다.
  모친은 그녀를 공부시키기 위해 철없던 어린 시절 출석교회인 평남 용강군 삼화면 삼화교회의 목사 댁에 맡기기도 하고, 진남포에 유학시키기도 한 가운데 결국 평양에서 개최된 등급사경회에 참석한 것을 기회로 광혜병원 전도부인댁에 기거시키며 1905년 소학교인 정진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정진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소녀시기를 통하여 일찌감치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전도부인이 될 결심을 하였고, 자신을 향한 엄숙한 맹세를 평생 동안 굳게 지켰다. 그녀는 이미 소학교 시절을 통해 인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정진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진학한 숭의여학교 시절에는 셋째 오빠인 리효영을 통해 암울한 민족의 현실에도 눈을 떴다. 오빠는 그녀에게 “이 세상에 제 나라가 없는 사람은 하늘나라도 없다는 사실을 너 아느냐? 효덕아! 예수를 암만 잘 믿어도 제 나라를 잃어버리고는 천국이 내 천국이 되지 못 한단다”라는 민족적 신앙의 가르침을 전했고, 이는 그녀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하며 그녀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삶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1912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의 고향 교회인 삼화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사 역할도 하면서 삼화교회 전도부인의 역할도 함께 병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이듬해인 1913년에는 모교인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학교 동료인 황애덕과 자신이 주축이 되어 숭의여학교의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하는 여성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이 비밀결사조직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합하여 ‘송죽회’(松竹會), 일명 ‘송죽결사대’라고 그 이름을 칭하였다. 송죽회는 그래도 나이가 많은 ‘송형제회’와 이들의 추천과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그 가입이 허락된 나이가 어린 ‘죽형제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 정부의 지시를 받아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다.  
  한편, 그녀는 2년간의 숭의여학교 근무기간이 끝난 이후 황해도 신계군 신계읍 교회내 소학교 교사이자 신계읍교회 전도부인으로, 그 후 평남 강서군 신정면 신정시교회 내 사달학교 교사이자 신정시교회 전도부인으로 근무하다가 평남 중화군 양정면 곤양교회내 양무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녀가 양무학교 교사로 재임하던 시기에 민족적 대사건인 3·1 독립만세운동이 발현하였다. 최응규 교장과 그녀를 비롯한 양무학교 교직원들과 학생들도 이에 참여하였고, 재판을 통해 6개월을 선고 받은 가운데 1920년 4월까지 13개월간 여자죄수를 수감하는 평양감옥 대흥부출장소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4월 그녀가 만기를 채우고 출감하였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넉달 전 만주에서 소천한 모친의 사망이라는 ‘비보’였다. 이 때문에 찾아온 정신적 충격 속에 그녀는 이름 모를 ‘죽을 병’에 걸렸다. 그런 중 주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고, 서원 기도 이후 그녀에게 찾아온 이름 모를 ‘죽을 병’이 기적처럼 치유된 가운데 서원한 대로 1920년 후반 경성 죽첨정에 자리한 감리교 ‘부인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21년 3·1운동 2주년을 기념한 만세 시위 운동을 준비하던 막바지에 시위 준비가 발각되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정학 처분을 받아 학업을 중단하였다. 평양남산현교회 부 전도부인으로 근무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다시 복학이 허락되어 공부하던 중 학교 명칭이 ‘협성여자신학교’로 변경되어 제1회 졸업생으로 1924년 3월 28일에 졸업하였다.
  그녀는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태화사회관 성경학원의 교무 및 사감으로 근무하다가 태화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고, 그 후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 겸 사감으로 근무하면서 전주 YWCA 활동으로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928년 겨울 찾아온 안면 마비병으로 1929년 초 교사 및 사감직을 사임하였고,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인 YWCA 총무직 제의마저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악화된 건강 문제로 인해 잠시 휴양을 취한 그녀는 1929년 9월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새로운 기회인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총무직 제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라는 ‘통 큰’ 생각 속에 받아들였다. 금주 · 금연운동으로 상징되는 절제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절제회에서는 순회 강연회를 하고 계몽 포스터를 살포하며 금주가를 보급하였다. 1931년 「절제」라는 기관지를 창간하여 분배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약 300여개 지회를 조직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특히 그녀는 전국 박람회를 시발로 전국 및 만주까지 순회하는 금주 · 금연 강연회 속에서 당대의 웅변가로 우뚝 섰다. 또한 조만식에 의해 애국운동과 자주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물산장려운동도 절제운동의 일부분이었는데, 특히 생활개선 차원에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별칭을 가진 조선인의 상징인 ‘흰옷’ 대신  ‘색옷’ 입기를 장려하며 손수 명주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녀 몸소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절제운동에 혼신을 쏟았던 리효덕은 건강이 날로 악화된 가운데 1937년 절제회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하지만 병약한 중에도 수개월 만에 개교회 현장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수표교교회 전도부인으로 사역하였다. 그렇지만 일제 말기를 통하여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그녀는 1941년 혁신교단 출현 이후 전도부인직을 파면 당하였다. 이로 인해 잠시 경천애인병원에서 회계 일을 맡기도 하였지만 1943년 동대문교회 전도부인으로 사역하면서 또 다시 개교회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처럼 동대문교회 전도부인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기에는 화양교회, 그리고 6· 25전쟁 중에는 청량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발생한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끝내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 중에 그녀는 ‘도강파’가 되지 않고 ‘재경파’로 남았다. 서울에 ‘남은 자’가 된 그녀는 인민군 치하 90일 동안 동대문교회를 지키며 한 주일도 문을 닫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오고 있다. 6·25전쟁 직후인 1955년 5월 10일 동대문교회에서는 60년 동안 한결같이 감리교회를 위해 일해 온 리효덕 전도사의 환갑을 맞이하여 환갑 예배를 성대하게 거행하여 주었다.
  그녀는 은퇴 후 정릉에 소재한 안식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8년 9월 15일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9월 18일 화양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은 200만원도 자신이 ‘어머니’로 추대된 바 있던 경민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였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난 그녀는 ‘가문의 별’을 넘어 ‘민족의 별’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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