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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과 무궁화 - 현재호

성서와문화 2016.05.20 20:10 조회 수 : 3208

남궁억과 무궁화

 

현재호 (한서감리교회 목사)

 

18631227, 서울 재동에서 태어나서 자라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남궁억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였다. 19181214일 남궁억은 동지인 장지연에게 “1220일에 가족을 이끌고 선영이 있는 모곡리로 내려 갈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남궁억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오늘의 한서교회는 그가 낙향하여 세운 학교이며 이곳에서 소천하시기까지 22년 동안 무궁화운동과 교육으로 신앙구국과 교육입국의 일념으로 사셨다.

191812월은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코앞에 둔 때다. 세계열강의 조선 침탈야욕이 일제의 손을 들어 준 역사 속에서 조선의 정부와 관료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개인의 출세와 영달만을 위하던 자들이 일제와 손을 잡고 그 앞잡이가 되어 광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때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자주와 주권을 찾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이들이 있었다. 개화기로 불리는 1980년대부터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외치기 시작한 우국지사들이다. 1918년은 이들 우국지사들의 민족적 분노와 저항이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꼭지까지 차오른 때였다. 남궁억은 바로 이들의 맨 앞에 서서 조선의 독립을 노래하며 그 길을 열어 온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이 있다. 독립협회와 황성신문과 대한협회가 그것이다.

딱히 내세울 만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가난한 형편에서 자란 터라서 한문 공부조차 어깨너머로 한 그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가는 길목에서 있었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엮어내며 이끌어 가는 민중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은 순전히 그의 타고난 재질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식 학력은 1883년 재동에 설립한 관립 영어학교가 전부다. 외무를 담당하는 통리아문의 동문학에 소속된 최초의 외국어학교다. 그것도 그해 7월에 입학하여 세관본부인 총해관에서 견습생으로 영여를 익힌 다음 1886년 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다. 불과 3년여의 공부가 그를 개화기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내는 구국의 심장이 되는 유일한 공부였으니 그의 탁월한 능력을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영어 공부는 그를 고종황제가 외국 사절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를 통하여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실상을 가늠하는 가운데 민족의 자주와 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우국지사들의 힘을 모으고 결속하며 민중을 일깨우는 중심에 서서 일하게 한 것이다.

189541, 토목국장(3)에 임명되어 광화문과 종로 일대의 길을 넓히고 탑골공원을 세운 그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자주와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결성한 독립협회(1896-1898)”의 간사원이 되었다. 10명의 간사원 가운데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이가 남궁억이다.

남궁억이 이후 전개한 무궁화운동의 방법과 운동은 곧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운동의 여파로 민족적 분노와 자긍심과 자주와 주권을 주장하고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민중의 열망은 산불처럼 도처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2002년 월드컵 응원가 대한민국 *** **”과도 같은 것이었다. 봄이 지나 여름이 되면 비로소 피어나는 꽃 무궁화처럼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의 수많은 침략과 수모를 이겨내며 꽃을 피운 역사다. “꽃 중의 꽃 무궁화라 칭할 만큼,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당당히 맞서서 계절을 넘고 피는 꽃이다. “빛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꽃 무궁화는 신 새벽 채 어둠이 가시기 전부터 피기 시작해서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동무하다가 저녁이 되면 어둠이 싫어서 얼굴을 가리고 떨어져 내일을 기약하는 꽃이다.

우리는 무궁화처럼 강한 생명력과 강인한 정신으로 살아 온 민족이다. 오죽이나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아왔으면 애국가의 첫 마디조차 그토록 처절하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던가! 그토록 만난을 헤쳐 쓴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하나님을 경외(경천)하는 신심으로 우뚝 선 민족이고.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정신(애인)으로 살아온 민족이다. 우리는 시시한 민족이 아니다. 이 정신으로 지금의 이 현실도 힘을 모아서 헤쳐 나가자고 한 것이 남궁억과 윤치호의 무궁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1923년 남궁억이 이곳 모곡리에서 쓴 무궁화 예찬시와 그가 지은 100여곡의 애국사상가에는 이런 무궁화운동의 정신이 아름답게, 혹은 가슴을 설레게 하고 아프게도 하는 노랫말로 가득하다. 작품의 예술성만으로도 뛰어난 셀 수 없이 많은 무궁화 자수들과 길가 어느 곳에서든 피어나 만개하는 꽃 무궁화를 통하여 특별한 민족의 정신을 노래하고, 독립을 위한 불굴의 정신을 심고 가꾼 이가 바로 이들이다.

남궁억과 윤치호 두 사람 모두 남감리회인이다.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본처전도사의 직임을 받았다. 위기에 처한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의기투합했으며. 사돈으로까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가운데서 함께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이는 갖은 술수와 무력으로 맺어진 “1905년 을사늑약이었다. 인정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조약은 정당한 절차를 통하여 맺어진 조약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잔인했다. 그렇게 터진 물꼬를 막을 힘이 어디에도 없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대가치고는 너무도 혹독한 시련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저항했던 건 정치지도자나 권력을 가지고 행세하던 이들이 아니었다. 1907년 남궁억이 회장으로 나서서 조직한 대한협회가 분연히 일어섰다.

대한협회는 민족교육을 시작으로 산업을 개발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등의 일을 통하여 민족의 자치와 주권을 지키고 세우고자한 유일한 민간결사단체였다. 이때 도모한 민족 교육의 사상과 외침이 이 땅 곳곳에 스며들었다. 전국 도처에서 우국지사들이 땅과 돈을 내고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거의 대부분이 예배당과 함께였다. 남궁억의 교육사상과 실천은 각별하고 특별했다. 여성교육과 과학과 예능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창의적 교육과 실천적인 실습 위주의 교육뿐 아니라 21세기 신교육 개념이라고 하는 감정코칭의 교육을 실천했다. 그가 펴낸 교육월보와 역사책 조선이야기한글서예교본은 그가 주창해서 이어 온 무궁화운동과 더불어 암울했던 시절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며 자주와 독립의 주권 수립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찬송가 580일하러 가세를 지으시던 밤에 그가 드린 기도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젊어서 가졌던 애국심을 변치 않게 하시니 감사하거니와 앞으로 더 혹독한 왜정 하에서라도 이를 육과 영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와 함께 1933년 일흔 한 살의 나이로 마지막 옥고를 치르던 그가 검사의 취조에 답한 말 어둠에 앉은 이 백성이 깨어나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 당연한 일이기에 이를 위하여 해 온 무궁화운동은 내 주의이고 사상이다. 어서 법대로 하라에 그의 이러한 신앙과 불굴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한서(翰西)는 남궁억의 호이다. 원래 그가 낙향하여 세운 교회와 학교의 이름은 모곡예배당과 모곡학교다. 이 예배당과 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해방 후에 다시 세워진 교회가 오늘의 한서교회이고, 한서초등학교다. 한서교회와 나란히 선 곳에 한서기념관이 세워져서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신앙과 구국의 일념을 품고 피어나는 무궁화동산도 조성되어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묻고 답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신앙과 애국에 대한 답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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