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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부활. 만질 수 있는, 그러나 만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


심광섭 (감신대 교수, 조직신학)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이 꿈꿨던 희망이 쓸모없는 공상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해준다. 부활은 우리 희망의 근원이다. 그러나 부활이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까지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화롭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여전히 열정과 연대와 우정, 그리고 배반과 버림받음의 흔적들을 지니고 계시다.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는 그의 삶을 십자가로 몰아갔던 화해의 끈에 대한 육화된 기억이다. 그의 몸에 난 상처는 가난한 자, 죄인, 창녀 그리고 다른 하위주체에게 쏟은 열정적인 사랑의 표시이며 동시에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공포로 그를 버리고 도망쳤던 사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만일 부활이 진정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라면 부활은 예수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정의했던 그들의 관계도 보장하고 복구해야 한다. 부활은 자율적이지만 고립된 개인의 삶의 회복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친구 됨의 회복이며 화해여야 한다. 부활의 승리는 버림과 배신에 대한 친구 됨의 승리이며 개인주의의 소외에 대한 공동체의 승리여야 한다. 부활은 갈보리에서 일어난 분리, 제자들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분리를 다시 잇는 끈들이다. 화해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분은 실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이시고 믿지 않는 제자인 도마에게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만져 보도록 하신다. 얼마나 몸과 살이 떨리는 충격적인 장면인가!(요한 20: 24-29)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는 도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는 장면을 끔찍하게 그려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는 것은 편치 않다. 카라바조 이전에 어느 화가도 이 장면을 그처럼 사실적이며 잔인하게 그린 화가는 없다. 그 어떤 화가도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그렇게 잔혹하며 끔찍한 아픔을 야기할 정도로 보여준 화가는 없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품을 열어 보라고,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신다. 몸의 열린 상처 안으로 도마의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간다. 도마의 손가락은 마치 상처의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측정하려는 것처럼 예수의 몸의 피부를 젖히고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다른 두 제자들도 잔뜩 신기한 모양으로 이마에 주름이 접힐 정도의 긴장한 모습으로 그 상처를 주시한다. 카라바조는 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사실처럼 그렸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3일 전에 갈보리의 예수를 뒤로 하고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비극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상적인 일, 어부, 세리 등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도마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참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타나 바로 그 불편한 과거를 그들에게 기억나게 하고 일상의 평형을 찾아 가려던 그들의 의식의 표면에 구멍을 낸다. 가면을 쓰지 않은, 화장하지 않은 무의식의 진실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들의 면전에 그의 몸에 난, 아직 아물지 않았을 그의 상처를 열어 보인다. 그는 지나간 자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지 않는다. 그는 “용서하고 잊으라,” 하고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그들의 버림과 배신의 고통스러운 결과에 직면하도록 하신다.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예수와의 우정이 회복되기 전에 기억의 회복, 아무 잘못이 없는 고난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활과 화해는 과거의 고난을 잊는 게 아니다. 과거의 불의는 미래의 승리로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의 고난은 영원히 부활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남는다. 상처는 그리스도의 몸에 새겨진 채 남는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며 그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동시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과거의 사실이며 현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에 직면하여 끊어진 끈들, 아버지와 제자들과의 끈을 다시 잇는 역사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자신이 부활한 사실을 단순히 알리려는 데 있는 것이거나, 믿기지 않는 부활의 사실을 단지 믿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된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데 있다. 제자들이 지울 수 없는 예수의 상처를 기억하고 상처에 반영된 자기 자신들을 바로 인식할 때, 그들은 상처가 새겨진 부활의 몸으로 건네는 예수의 사랑의 초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어디서나 당신을 본다
우주의 환희로 이은
아름다운 상흔을
눈 비비며 들여다본다
-이해인, <4월의 환희> 중에서


어디서나 당신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부활생명이 드러나는 ‘우주의 환희’는 여전히 그분이 메고 갔던 십자가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상흔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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