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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나라사랑(3) - 우남 이승만, 그는 독재자였을까?

 

강근환 (전 서울신대 총장, 한국교회사)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순간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야기란 그 사건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그런데 그 해석은 동일하기보다는 다양하다. 왜냐하면 그 사건을 보는 시각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나름대로의 시각에 따른 사건의 해석을 소위 사관이라고도 한다. 이 글도 그런 전제하에서 쓰고 있다.

 

우남 이승만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우뚝 선 거인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잊혀진 이거나, 아니면 독재자라는 희미한 인상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정말 독재자였을까?’를 묻는 것이 이 글의 요점이다.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대명사를 갖게 된 것은 3?15부정선거로 기인된 4?19학생의거가 대표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그 배후에는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1948년부터 4?19학생의거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되는 1960년대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의 장기집권을 누렸다. 그리고 종당에는 1960315일 제4대 정?부통령선출 선거에서 부정투표 사건으로 결국 하야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발원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0228일을 기하여 대구에서 경북고를 필두로 일어났던 1,200명의 학생시위였다. 그 후 3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이어서 411일에는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이에 격분한 시민들의 2차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419일 학생 시위대가 경무대(현 청와대) 앞 중앙청에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래도 계속되는 학생을 비롯한 교수, 시민들의 시위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방송을 통하여 선언하였다. 4?19학생의거는 185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낳았으며 파고다공원의 이승만 동상은 쓰러뜨려졌다. 그리고 5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떠났다. 그렇게 독재자로 낙인찍힌 영상만이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이승만에 대한 희미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정작 독재자였을까?

 

나는 그를 독재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독재자였다고 본다. 우남 이승만의 생애는(1875-1965)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일제시대, 해방 후 대한민국 시대 등이다. 이 세 시기에 걸쳐 그는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열렬히 맞서 싸운 투사였다.

1기인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시대는 왕조의 전제정권에 도전한 시기였다. 그는 무능한 독재왕권을 타도하고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려다 투옥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과거에서 실패하고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서양학문과 영어를 습득한 그는 일찍이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선배들을 따라 약관의 젊은이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공화제를 외쳤다. 결국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1899). 그는 옥중에서 기독교로 회심하여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며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민영환 등의 고관들의 도움으로 감형되었다가 출옥하게 된다(1904). 그는 민영환의 주선으로 밀사로 도미하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방문하여 일본 침략의 위협을 알리며 보호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직후 1905년 미?일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어 수포로 돌아가자 배신감과 분노의 한을 가슴에 안은 외로운 청년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학하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를 마치고(1907),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정치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하였다(1910.7). 그는 그해 10월에 귀국하여 월남 이상재를 도와 황성YMCA(현 서울YMCA) 청년간사로서 일하면서 경향 각지로 순회하면서 교육과 계몽운동으로 활동하였다.

 

2기인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 망명투쟁의 시대였다. 1912년에 일어났던 105인 사건의 여파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326일 망명의 길로 도미하게 된다. 그해 5월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개최되는 국제감리교회 대회에 평신도 자격으로 참가한다는 명분이었다. 그 후 그는 하와이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한 교육과 문서 활동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적으로 홍보하였다. 1919년에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하여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잠시 상해를 방문하여 체류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무력투쟁파와 그의 평화적 외교정책과의 대립으로 불화가 조성되자 그는 하와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하와이에 머무르면서 계속 후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임정의 구미외교위원부 및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의 임무를 맡아 미국과 유럽을 무대로 항일 대한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참가를 신청하기 위하여 임정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 본부를 방문하여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언론에 배포하고 인터뷰를 함으로써 세계에 널리 호소하였다. 이때 제네바 호텔 식당에서 만나게 된 오스트리아 여성 프란체스카와 후에 결혼하여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남은 미국에 거주하면서 외교활동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직후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국을 잃게 되자 크게 실망하고 불신감을 갖게 되었고, 미국 정계와 관료들 가운데 잠재하고 있는 친일파와 친소파들을 경계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마침내 그는 1940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저술을 출판하여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다. 그는 수준 높고 해박한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일본제국의 음험한 침략적 야욕의 내막을 파헤쳤던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 내 평판이 초기에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했으나 1941127(현지시간)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켜 새로운 평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정 하에 2차 대전 기간에는 미군OSSS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였고, 미국 체신청에 청원하여 태극기 모양이 찍힌 우표를 발행하여 대한민국의 존재를 선전하였으며, 항일 단파방송을 통하여 조국의 동포들과 소통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결국 1945815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조국은 해방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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