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6년 성서와 문화

가을이 더 아름다운 사람

 

정광일 (가락재 영성원 원장, 신학)

 

한 해를 말할 때 달력으로는 1월에서 시작하여 12월로 마치지만, 자연으로 느끼는 삶으로는 봄에서 시작하여 가을로 마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춘추(春秋)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고, 나이를 춘추로 물으며 또 역사도 춘추로 기록합니다. 봄에서 가을까지를 어떻게 보냈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우리말의 은 계절이나 절기 또는 시절을 뜻하는 낱말인데, 이 말로 사람의 성장이나 성숙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철부지라는 말은 때가 왔지만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철들었다는 말은 제 때를 알 정도로 자랐다는 뜻입니다. 철 가운데 철은 가을입니다. 우리는 가을을 맞고 또 보내면서 비로소 철이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봄철로 한 해를 시작하여 여름을 보내고 가을로 접어들어 누런 벼이삭과 과일과 붉게 물드는 단풍과 낙엽을 바라보며 한 해를 마감합니다. 이런 마감을 몇 번 했느냐가 곧 그 사람의 나이가 되고요. 그리고 그 나이는 몇 번의 철이 들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을은 철이 드는 계절입니다.

 

새싹에서 봄의 기운을 느끼고 청록에서 여름의 색감을 맛봅니다. 청록(靑綠)은 하늘과 바다와 숲의 푸름을 함께 아우르는 색깔입니다. 세계적 자랑거리인 고려청자가 빚어내는 색이 바로 그것이지요. 어린 가지에서 막 돋아나오는 연둣빛 잎사귀들이 짙은 초록으로 바뀌면서 숲은 넉넉한 어머니의 품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푸름도 그 빛을 다하고 시들면서 청록은 누렇게 바뀝니다. 빛이 바래 퇴색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가을의 들과 산은 황토색으로 물들게 됩니다. 이렇게 누런 황토 빛으로 물들어감에서 어떤 영성적 교감을 얻습니다. 영성의 색깔은 밝고 화려해서 누구라도 좋아하는 그런 빛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소 어둡고 탁한 빛으로 드러납니다. 영성을 넓이나 높이보다는 깊이로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깊이 있는 색들은 어두운 색이 깃들여져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천자문에 하늘 천 따 지...” 이어서 검을 현()이 나오지요. 뜻풀이를 보면 검다, 검붉다, 오묘하다, 심오하다, 신묘하다, 깊다, 고요하다. 그래서 영성(靈性)은 현성(玄性)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가락재25년 전 개신교 영성원으로 설립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계절로도 구별이 됩니다. 휴가철인 여름에는 주로 대학생이나 청년들이 수련회 장소로 이곳을 찾습니다. 겨울에는 신학교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옵니다. 봄과 가을에는 개인이나 아니면 삼삼오오의 팀을 이루어 방문합니다. 개인으로 이곳을 가끔 찾는 한 자매와 문자를 주고받던 가운데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가락재는 가을이 더 아름다워요사람에 따라 어느 한 계절을 더 좋아할 수 있겠지만 같은 장소라도 계절에 따라 그 맛과 멋이 다를 수 있겠지요. 시골 마을 뒷동산은 봄에 더 어울릴 것 같고, 지중해를 품에 안고 있는 파란 지붕의 하얀 예배당은 여름에 더 어울릴 듯하고, 도시 한가운데서 너른 뜰로 사람들을 맞는 고궁은 가을철이 제격일 듯싶고, 깊은 산 고즈넉한 산사(山寺)는 겨울 풍경이 제 맛일 것 같습니다. 가락재는 어떨까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아기에서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여, 봄에서 시작하여 여름을 지나고 가을에 무르익고 겨울로 접어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든 나름대로 각자의 전성기가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 특출함을 보이는 사람, 학창 시절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 장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사람, 그리고 노년기에 더욱 그 진가(眞價)를 드러내는 사람. 익어가는 밤송이를 사진으로 담아보며 인생의 가을이 더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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