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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기독교: 경교(1) - 안경덕

성서와문화 2016.05.20 20:18 조회 수 : 3201

중국과 기독교: 경교(1)

 

안경덕 (몽골 선교사, 경영학)

 

기독교는 여러 차례 중국 땅에서 전파되었다. 7세기 당나라 때에는 경교, 13세기 원나라 때에는 경교와 천주교, 16세기 말에는 천주교였고, 개신교는 19세기 들어서서였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기독교와 중국과의 관계를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살피기로 한다.

 

대진경교중국유행비

 

1623년 예수회 선교사 세메도(Semedo, 1585~1658)가 시안(장안)에서 석비를 발견하였는데 여기에는 경교(동방교회 또는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중국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상당한 정보가 들어 있다. 비석 앞면에 모두 1,800자의 한자, 밑동에는 시리아 문자와 한자로 7812월에 세웠다는 간기(刊記)가 새겨져 있고, 시리아 문자와 한자로 70명의 기부자 명단도 새겨져 있다. 앞면 상단에 세 쌍의 용들이 트림을 하면서 갈고리 발톱으로, 태양의 상징인 화염에 싸여있는 여의주를 잡아 쥐고 있고, 그 밑에 '대진경교중국유행비(大秦景敎中國流行碑)'라는 비명이 있다. 동방교회 십자가가, 구름과 두 나무 가지 사이 연꽃 위에 놓인 채 태양과 위에 있는 세 개의 상징들 가운데 놓여 있다. 따라서 동방교회는 시각적으로 도교와 불교와 연관을 보이면서 더 높은 자리인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 상황을 보면, 구름과 여의주는 도교에서 말하는 음양 원리이고, 연꽃은 불교의 고전적인 상징이므로, 세속적인 존재라는 침침한 연못 위로 솟은 영적인 탑(석비)의 순정함을 보여준다. 이 모티프는 동방교회 교인들 묘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부활의 십자가 안에 가득 차 있는 중국인들의 종교성을 암시한다.

이 비석이 발견되자 중국과 유럽에서 이것이 마테오 리치(Mateo Ricci)보다 천 년 전에, 또 원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주교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보다 700년 앞서 기독교가 중국 땅을 밟았다는 증거라 하여, 큰 반향이 일었다. 기독교가 7세기 초 중국에서 크게 번창했었고 황실의 보호를 받았다는 증거였다. 선비족이 세운 당나라는 외래종교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이어서 동방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아라본이 태종(626~649)의 환대를 받고 장안에 대진사라는 교회당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고종(650~683) 때에도 경교는 번창하였지만 측천무후(685~704) 때 잠시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현종(712~756) 때 아라비아에서 수라함(Abraham)과 급열(Gabriel)이 선교사로 왔으며, 길화(George)도 입국하여 경교가 재기할 터전을 마련하였다. 대진사 주교였던 경정(景淨)781년에 쓴 경교비에 잠시 무너졌던 가르침의 기둥은 다시 높이 숭상되었고 잠시 기울어졌던 도()의 반석은 다시 굳건하게 세워졌다고 하였다.

경교비의 역사 서술부분의 요약이다: ‘...페르시아의 주교 알로펜은 중국에 성군이 나실 것을 예측하고 성경을 지니고...정관 9(635) 장안에 도착하였다. 황제께서는...황궁에서 경서를 번역하게 하시고...직접 복음에 대해 물으시었다. 복음이 바르고 참되다는 것을 깊이 아시고는 [경교를] 전파할 것을 명하시었다.’

이어서 638년에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니 깊고 오묘하고 꾸밈이 없으며, 근본교리를 고찰하여 보니 모든 것을 다 갖추었고 요지가 분명하다. 가르치는 문구에 번잡한 주장이 없고 이치는 문구를 떠나 내적인 깨달음을 준다. 만물과 사람에게 두루 유익하니 온 나라에 전파되어야 마땅할 것이니라.’ 이에 장안 의녕방에 예배당을 짓고 선교사 21인을 두게 하였다. ()왕조가 덕을 잃자 노자는 검은 소가 끄는 수레를 몰고 서쪽으로 가버렸고, [세월이 흘러] 위대한 당 왕조가 빛을 발하자 경교의 바람이 [되돌아] 동쪽을 향해 불게 되었다.

'검은 소를 탄 사람'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서 소를 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도교의 영적인 창시자 노자(老子)이다. 전승에 따르면, 후주(後周, 기원전 770-249)가 도덕적으로 문란해지자 노자는 검은 소를 타고 이 왕국을 떠나 서방으로 갔다고 한다. 이제 덕망이 높은 당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노자의 지혜가 동방교회라는 모습으로 성령, 즉 밝은 산들 바람의 도우심을 받아 귀환한 것이다. 650년쯤 세워진 경교 대진사는 노자가 승천하기 직전에 도교 경전인 도덕경을 쓴 곳이라고 한다. 토속종교로 황실의 지원을 받았던 도교와 함께 호흡하였던 경교의 가르침이 온 나라에 퍼졌고, 당나라 전국에 11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또 광둥과 둔황, 코차에도 많은 신자들이 있었다. 이제 동방교회는 비단길이 닿는 곳이면, 다마스쿠스에서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을 거쳐, 메르브, 사마르칸트, 투르키스탄, 또 시안, 황해 연안까지, 없는 곳이 없었다.

경교는 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소멸 이유에 대해 여러 연구가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무종(840~846)845년에 일으킨 회창폐불(會昌廢佛) 때문이었다. 무종은 한 도사의 말을 듣고 절을 파괴하고 26만의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대대적인 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토착종교인 유교와 도교를 제외하고, 외래종교인 경교, 이슬람,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도 직접적인 피해를 함께 입었고, 경교신자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이주하여 실크로드의 변방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다음 회에는 경교의 경전: 중국 최초의 성경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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