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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의 쇠퇴와 종교체험

 

김성민 (협성대 교수, 종교심리학)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는 소리가 높아진 지 오래 되었다. 많은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삶에서 종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추세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서구 사회의 경우 제2차 대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 원인은 현대 사회에서 자연과학의 발달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으려는 성향이 늘어나 물질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제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가지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종교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종교를 거부한 이후 더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 현대인들은 종교가 비어진 자리를 세상에서의 성공과 물질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공허감만 더 크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종교에서 맛볼 수 있었던 정동(emotion)을 술, 약물, () 등으로 채우려고 하고, 종교가 주었던 의미를 유사종교나 심리학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대단히 높다. 현대인들은 그 전에 종교에 물었던 질문들인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의미 있게 살 수 있는가?”,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제는 심리학에 묻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어에서 온 psyche라는 말은 영어로 mindsoul로 번역되어, 심리학은 그 전에 종교에서 담당했던 영혼의 문제를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psychology가 그 전에 종교에서 담당했던 것들을 모두 포괄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 가운데는 교회의 책임도 크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지적으로 발달한 현대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믿음을 강요하는 교회의 태도이다. 현대인들도 교회에서 제시하는 것들을 믿고 싶어 한다.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과 그리스도의 대속과 천당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은총으로 주어지지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안타까움을 헤아리고 현대인들에게 체험하게 해야 한다.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현대인들은 믿음보다 체험을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보다 의식이 많이 발달하여 종교적 도그마를 순진하게 그대로 다 믿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의 근본적인 토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융은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신경증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영혼의 고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금 많은 현대인들은 그들이 왜 사는지, 또 왜 살아야 하는지 뚜렷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그런 삶의 태도는 현대인들을 신경증으로 몰고 간다고 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에게는 삶에 대한 뚜렷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가문을 위하고, 문벌을 위하며, 효녀가 되고, 열녀가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들의 삶에는 의미가 충만했다. 신앙인의 경우 내면에 있는 정신에너지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갔고, 거기에서 사람들은 존재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졌다. 지극히 개인화된 현대인들은 이제 집단적인 것들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신들은 신앙인들에게 이제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충성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전에 신에게 부어졌던 에너지는 흘러갈 곳을 잃어버렸고, 그것들은 신경증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융은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신앙을 잃으면 신경증에 걸리지만, 신앙을 회복하면 신경증에서 낫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예를 들자면, 신경증 환자들의 증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척강박증 환자들은 손에 세균이 묻어 있을까봐 손을 씻고 또 씻으며, 고소공포증 환자는 높은 데만 올라가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신경증 환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두려워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은 자아가 그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정신요소에 에너지를 다 투입시키지 못해서 무의미한 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삶에서 물러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쩔쩔맨다. 신앙인의 경우, 그 전까지 하나님에게 부어졌던 정신에너지가 증상에 강박적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히 있었을 때, 그는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이 희미해져서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까 삶을 두려워하게 되고, 거기에 부어졌던 에너지가 신경증 증상에 고착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종교체험 가운데서 회심체험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체험자들의 삶이 그 체험을 전후로 해서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울의 체험이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체험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체험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어떤 깊은 것을 했구나 하는 것에는 동의하게 한다. 그 다음의 삶은 그 체험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심리학에서는 회심체험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단계는 실존적 위기 단계, 두 번째 단계는 자기-포기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의식의 고양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계, 다섯 번째 단계는 새로운 삶의 단계이다.

그리고 회심체험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 회심체험은 통합의 체험이다. 둘째, 회심체험은 깨달음의 체험이다. 셋째, 회심체험은 변환의 체험이다. 넷째, 회심체험은 계속적인 발달의 체험이다. 다섯째 회심체험은 구원의 체험이다. 회심체험을 통해서 체험자들은 하나님을 만나서 그와 하나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고, 그들의 분열되어 있던 내면을 통합시키면서 변환되지만, 그것이 직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치면서 다시 자기 포기를 하여 궁극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의 모습을 수많은 기독교 영성가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사람들의 내면에는 만신전이 들어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과 세계 각국의 신화와 종교에 나오는 모든 신들을 창작해내고, 회심체험자들이 그런 체험을 하게 한 종교적 영역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신전에서는 지금도 우주인들을 만들어내고, 공룡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그 영역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역동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들이 말하는 세계, 회심체험자들이 의지해서 살았던 그 세계에는 메마르고, 강박적인 현대인들의 삶에서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하고 흥미 있는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을 비판하면서 재신화화론을 주장하였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현대인들이 믿을 수 없게 된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을 비신화화하여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그 본문이 말하려는 의미만을 추출해서 해석하자고 했던 주장에 반대하면서, 우리 내면에는 성경에 나오는 그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는 풍부한 종교적 자원이 있으므로 그것을 다시 체험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 삶에 있는 종교적 영역을 되살리고, 종교적인 것들을 복원하여 이 세상의 작은 것들에 매몰되지 않고, 더 열정적이고 신나게 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신반포감리교회 평신도 아카데미 강의 원고. 201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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