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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의 빛을 따라서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6.11.29 10:14 조회 수 : 3697

본향(本鄕)의 빛을 따라서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

 

옛날에 한 스승이 있었는데 만나서 할 이야기도 따로 없던 차에 불쑥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선비 사() 위에 놈 자()가 있고, 놈 자 위에 집 가()가 있다그러셨다. 선비 는 박사이고, 는 학자이고, 그 위에 집 가 있는데, 자기는 예술가인 고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래서 내가 집 위에는 사람 ’()이 있다고 말을 받았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 농담 속에는 진담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귀한 시간에 쓸데없는 장난을 할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잘 연구하면 박사라는 학위를 받는다. 학위를 받고 더 깊이 더 넓게 연구를 하면 학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무슨 규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박사라 하면 전문가라는 느낌을 받고, 학자라 하면 인격체라는 느낌을 받는데, 예술가라는 말 속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 자로 가면 존경의 대상으로 되어서 도인(道人), 성인(聖人)이란 칭호를 쓰게 된다. 인도에 테레사 수녀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으로 추대를 해서 흠숭의 대상으로 되었다. 그런데 그는 박사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로 높은 사람 자를 얻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했지만 그들에게 다 예술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니다. 자로는 잴 수 없지만 어떤 수준이 있어야 예술가라는 칭호가 붙는 것 같다. 옛날 시() () ()라 해서 그림보다 글씨를 높이 봤고, 글씨 위에 시를 더 높은 데로 본 것이다. 그림()은 복잡한 일을 하는 것이라서 높은 뜻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글씨()는 단순해서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으며, ()는 상징적인 언어로 원대한 진리를 표현할 수 있다 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최현배하면 한글학자이고, 이중섭하면 화가이고, 김소월하면 시인이다. 김소월이 시인이라 해서 가장 높으냐하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자 화가 시인 등 그런 칭호가 붙어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인데, 그 또한 무슨 때문일까. 그들의 삶이 훌륭했기에 그럴까. 저 위에 높이 떠 있는 좋은 모델로 오래 오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나선 것도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되었다. 세월이 가면 결국엔 가치 있는 것은 걸러져서 가치로 남는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았기에 그것이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누가 꾸며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선비 위에 놈 ’, 위에 집 .” 하신 스승의 농담이 가치에 대한 절절한 어떤 메아리 같이 내 가슴에서 울리고 있다. 지나간 한 평생 내가 어디를 헤매고 있었는지 묻는다. 돌이켜 봐도 다 부질없다. 오늘이라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 눈앞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허송세월 팔십 평생은 일장춘몽이었다.

 

小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쉽게 늙고 배워서 이룸은 어렵다

一寸光陰不可輕 잠깐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에 봄풀이 단꿈을 깨기도 전에

階前梧葉己秋聲 뜰 앞의 오동나무는 가을 소리를 내 누나

주자(송나라)

 

옛날에 또 한 스승이 있었다. 아무 볼일 없이 댁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해서 방에 앉았는데, 불쑥 한 말씀을 하셨다. “()과의 대화가 아닌가.” 그러셨다. 나는 그만 혼비백산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됐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뒤 삼십 년이 지나오도록 나는 그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그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기에 천만다행이지 무슨 말씀이냐고 묻기라도 했으면 낭패일 뻔 했다. 내가 새들의 말도 못 알아듣는데 한 예술가의 저 깊은 데서 나오는 외마디 소리를 어찌 알아듣는단 말인가. 그림의 언어도 그렇다. 그 단어들은 도저히 우리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아주 특별난 어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그림의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는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 불가능한 그림언어를 가지고서 화가들은 유창한 화면(?面)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모든 학문과 예술은 연구의 정도에 따라서 그 높이를 달리한다. 경우 경우에 따라서 그 깊이를 달리한다. 그 연구의 정도에 따라서 층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높은 예술가가 있고 낮은 예술가가 있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와 피카소처럼 모차르트와 베토벤처럼 특출한 예술가가 있다. 무엇이 다르기에 그렇게 긴 역사에서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단테를 말하고 톨스토이와 괴테 이야기를 한다. 중국에는 도연명이 있고 두보가 있다. 소동파와 같이 학문과 예술을 겸비한 인물들도 있는데, 오백년 천년이 지났는데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스님 현각이 말했던가, 종교방송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다. 우리의 두뇌에는 좌뇌와 우뇌가 있는데, 좌뇌가 활동을 중단하면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어떤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다. 우뇌로 보는 세계는 이 세상 언어를 가지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보았는데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빛이 있고 그 빛은 동시에 사랑이며 생명이며 기쁨이며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특별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림은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다. 좌뇌 활동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우뇌가 활동해야 된다는 말이다.

앞서 한 스승이 이른 말씀, 자가 높다하신 그 유머와 또 한 스승이 하신 말씀 신과의 대화가 아닌가.” 하는 그 독백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알게 모르게 모두 본향(本鄕)의 빛을 그리워한다. 예술가는 그 빛의 파동에 이끌려 한없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 하느님!’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한다. 하루 한 발짝씩만 올라간다면 일 년이면 삼 백 육십 발짝이고 몇 십 년을 올라가면 까마득한 하늘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진일보 할 수 있다면 이성 활동의 경계를 넘어서 우뇌가 열어주는 찬란한 광명의 공간을 볼 것이다.

예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초월의 길인가, 치유의 길인가. 예술을 통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귀뚜라미 우는 저녁에 잠시 붓을 내려놓는다. 목이 말라 내일은 또 저 산 속에 샘물을 얻으러 가야지. 맑은 물은 대개 깊은 숲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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