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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기독교 (2) - 경교의 경전과 찬송가

 

안경덕 (몽골 선교사, 경영학)

 

1904년 둔황 석굴에서 고문서 5만 점 가량이 발견되어 유럽의 학자들이 이를 대량으로 반출하였고, 일본인까지 가세하여 많은 분량이 조선총독부까지 이르게 된다. 거의가 불경으로 추정되는 이 고문서는 1036년에 봉인된 막고굴 17호에서 900년 가까이 보관되어 있던 문헌들로 요나라 이전, 주로 당나라 때의 것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고문서 틈에 기독교 관련 문서 몇 점이 들어 있었다. 이를 경교비와 함께 시대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 알로펜이 635~63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

2. 일신론(一神論): 알로펜이 641년에 쓴 것으로 추정: 비유; 일천론(一天論); 세존보시론(世尊布施論)의 세 부분으로 구성.

3.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경정이 781년에 씀.

4. 존경(尊經): 경정이 780~800년에 쓴 것으로 추정.

5. 삼위몽도찬(三威蒙度讚): 906~1036.

6.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1036년 이전.

7. 대진경교선원본경(大秦景敎宣元本經): 1036년 이전.

 

이 문헌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릴 것이며 선교대상을 누구로 삼을 것인가가 주관심사였다. 유교는 성선설의 입장에서 현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었고, 불교와 도교에서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동방교회에서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성육신 개념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또 불교와 도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업보라는 개념은 단 한 번의 부활과 믿음의 행위라는 기독교 개념과는 상반되었다. 따라서 동방교회 선교사들은 이러한 선교환경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고 이 문서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쓰였다.

서청미시소경은 한자로 쓴 가장 오래된 동방교회 문서로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 계명, 복음, 또 예수의 생애를 성육신부터 십자가 처형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일부가 찢겨 나가 부활 부분이 없어졌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이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 유교의 기본인 삼강오륜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가 유교윤리와 불교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파하였다.

일신론은 선교적 목적을 가지고 쓴 글로 유일신, 천국과 지옥, 도덕적인 삶을 통한 적선, 자유의지 등을 말하고 있다. 원죄 때문에 겉은 더러워졌지만 본성이 오염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또 창조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한 천사들처럼 완전함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 부분인 세존보시론은 산상설교를 고치고 늘린 것이고, 뒤이어 예수의 수난십자가 처형과 부활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동방교회의 양성론 교리의 근간을 볼 수 있다.

경교비에서는 삼위일체를 셋이 하나가 된 몸(三一妙身)이라고 부르면서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해 말한다. 또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셋이 하나로 되신 분이 나타나셨는데, 공경을 받아 마땅하시고 광채를 발하시는 메시아, 진정한 고귀함을 감추고 오신 분이라고 하였다.

찬송집인 존경에서 메시아가 인류의 모든 죄를 몰아내셔서 우리 본성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면서 삼위를 찬양한다. 따라서 도교 및 불교와 교류할 수 있는 길을 텄고, 이러한 사상은 8~10세기 동방교회 신비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지현안락경과 짧은 조각만 남은대진경교선원본경은 석가와 아난다 사이의 문답형식을 빌려 불교와 도교의 가치관과 도덕관을 기독교 사상과 계율에 일치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다. 즉 도교와 불교의 교리를 기독교적인 틀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즉 무욕, 무위, 무덕, 무증이 그것이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이런 선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자기네 운명을 군주의 호의에 의지한 나머지 기층으로 파고들지 못하였고 중국인들 심성에 뿌리를 내린 유불선이라는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죄구원유일신심판 같은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다음 회에는 몽골시대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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