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6년 성서와 문화

종교와 평화 - 평화, 폭력을 줄이는 과정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평화라는 말 속에 평화는 없다

평화라는 말이 넘쳐난다. 하지만 정작 평화는 없다. 평화는커녕 갈등이 더 커진다. 왜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평화를 바라기는 하지만, 실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개념과 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아가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인들이 그렇게 많아도 종교들 간에 갈등이 큰 이유는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평화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마다 평화를 기대한다고 해서 평화가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평화에 대한 이야기에 평화에 대한 정의가 빠질 수는 없다. 논의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작업 정의는 필요하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자.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소극적 평화적극적 평화로 나누곤 한다.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는 전쟁이 없는 상태, 좀 더 구체적으로 전쟁과 같은 직접적 또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해서 갈등이나 긴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갈등을 유발시키는 구조적이고 함축적인 폭력은 지속된다. 그렇다면 좀 더 실질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적극적 평화는 간접적 또는 구조적 폭력은 물론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까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으로 인해서 많이 알려지게 된 용어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하지만 적극적 평화의 상태는 얼핏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다.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마저도 없는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런 식의 정의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폭력이 일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힘들다. 좀 더 현실감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평화는 어떤 정적인 상태가 아니고,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을 줄이는 동적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 평화에 대한 인간의 책임의식도 반영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은 피해를 수반하는 사나운 힘

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평화에 대한 해설이 전부 폭력과 연결되어 있고, 평화에 대한 정의가 주로 폭력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경험이 평화가 아니라 사실상 폭력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평화보다는 폭력을 더 크게 경험해왔다는 점에서 폭력이란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폭력은 한자로 하면 사나운[] []이다. 영어 violence는 라틴어의 vis() ? violo(위반)에서 온 말이다. 이 둘을 합하면, 폭력은 정도가 지나쳐 피해를 주거나 파괴를 수반하는 힘을 뜻한다. 인류는 어떤 식으로든 사나운 힘 혹은 지나친 힘의 피해를 입거나 파괴를 경험해왔다. 역으로 이러한 피해나 파괴를 줄일 때 평화가 그만큼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평화를 이룬다는 말은 폭력을 줄인다는 말로 바뀔 때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문제는 폭력을 어떻게 줄일까이다.

 

종교의 폭력

무엇보다 평화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평화라는 말은 많아도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평화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계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가령 성서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16)’라고 선포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문장에 동의하는 이들에게만 그 사랑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갈라디아서 3:28)’라며 혈연, 신분, 성별과 관계없는 인류의 원천적 일치성에 대해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부사적 수식어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 에 있는 이들을 차별하곤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소서 2:14)일 뿐 너희와는 무관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들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평화라는 것은 결국 평화라는 이름의 배제를 낳을 뿐이다. 말이 평화지 사실은 폭력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아픔에 대한 타자지향적 공감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다. 폭력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동시에 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아픔이 그저 의 것인 한, 폭력 역시 남의 일이 되고, 그 폭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픔에 대한 공감이 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에도 자기중심적 공감(sympathy가 여기에 가깝다)과 타자지향적 공감(empathy가 여기에 가깝다)이 있다. 자신의 상황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것과 타자의 상황에 공감해가는 것은 방향이 다르다. 저마다 자신의 상황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데서 그치면 그 공감의 요청 역시 해결은커녕 도리어 갈등의 진원지가 된다. 타자의 상황에 대한 공감이 폭력으로 인한 아픔을 줄이고 그만큼 폭력을 줄인다. 거기서부터 그만큼 평화는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예수의 사랑과 긍휼, 붓다의 자비 혹은 맹자의 측은지심은 이러한 타자지향적 공감의 원리를 잘 말해준다. 폭력의 축소는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인이 갖춰야할 삶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8 일본 기독교 문학(3) - 엔도 슈사쿠와 함께 읽는 성서 이야기(3) - 김승철 성서와문화 2016.11.29 3803
57 중국과 기독교(3) - 몽골시대의 기독교 - 안경덕 성서와문화 2016.11.29 3680
56 영국과 대륙의 교감 - 김순배 성서와문화 2016.11.29 3708
55 BC와 유대인 - 김유동 성서와문화 2016.11.29 3646
54 문학에 비친 복음(5) - 주홍글씨 - 이상범 성서와문화 2016.11.29 3618
53 본향의 빛을 따라서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6.11.29 3708
52 기독교와 나라사랑(4) - 우남 이승만, 그는 독재자였을까(2) - 강근환 성서와문화 2016.11.29 3843
51 설렘과 떨림의 미학 - 행복한 청소부를 읽고서 - 조신권 성서와문화 2016.11.29 3750
50 개신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성서와문화 2016.11.29 3680
49 천도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 김용휘 성서와문화 2016.11.29 3649
48 가톨릭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 주원준 토마스 성서와문화 2016.11.29 3381
47 유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 전병술 성서와문화 2016.11.29 3374
46 불교의 평화론-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 윤남진 성서와문화 2016.11.29 3439
» 종교와 평화 - 평화, 폭력을 줄이는 과정 - 이찬수 성서와문화 2016.11.29 3632
44 다시, 크리스마스 - 김기석 성서와문화 2016.11.29 3646
43 66호 드리는 말씀 - 이계준 성서와문화 2016.11.29 3217
42 중국과 기독교 (2) - 경교의 경전과 찬송가 - 안경덕 성서와문화 2016.08.27 3555
41 일본 기독교 문학(2) - 엔도 슈사쿠와 함께 읽는 성서 이야기Ⅱ - 김승철 성서와문화 2016.08.27 3185
40 아르스 노바, 새로운 음악들 - 김순배 성서와문화 2016.08.27 3234
39 문학에 비친 복음(4) - 앙드레 지드 <좁은 문>(2) - 이상범 성서와문화 2016.08.27 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