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5년 성서와 문화

가을 앞에서 - 이반

성서와문화 2016.05.20 19:51 조회 수 : 1665

가을 앞에서

 

이반 (숭실대 명예교수, 극작가)

 

가을은 정직한 결실의 계절이다. 봄과 여름에 열심히 씨 뿌리고 가꾼 농부에게 많은 열매를 주고 게으른 농부에게는 적은 수학을 안겨준다. 이 계절의 말없는 질서는 반복되고 변하지 않는다. 이 질서를 주관하는 절대자를 우리는 신이라고 한다. 가을은 신이 바쁜 계절이다.

신은 열심히 땅을 파고 땀 흘려 김을 매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의 곡간을 채워주기 위해 바쁘다.

가을이 깊어지면 신은 곡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마을 변두리에서 텅 빈 곡간이 많음을 보고 텅 빈 곡간을 채워주기 위해 더 바빠진다. 겨울을 나기 위해선 연탄도 있어야 하고 쌀도 필요하고 김장독도 채워야 한다. 쌓인 곡식 자루와 장작더미를 광에 채우기는 힘들지 않지만 가진 것이 없는 빈손으로 텅 빈 광을 메우는 일은 정말 힘들 것이다. 그래서 신은 가을이면 바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시골에 와서 산지도 십여 년이 되어 간다. 사람의 생을 계절로 치면 지금의 내 나이는 가을에 해당된다. 일 년 전 봄의 이야기다. 교회에서 권사님 두 분이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황달이 왔다고 했다. 급히 큰 병원에 갔더니 간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지루한 검사 과정을 거친 결과는 수술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두 주간의 준비 과정을 지내고 수술에 들어갔다. 열여덟 시간 수술 끝에 중환자실 침대에 다시 와서 누우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공간과 시간이 뒤엉키고 사람들이 무리로 또는 혼자서 눈앞에 어른거리는 틈새로 정신이 들어올 때도 있었다.

맑아지는 정신 속에서 이제 나도 가을 속으로 들어왔고 겨울이 올 터인데, 내 곡간은 차 있는가, 텅 비기만 하지 않고 무엇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기는 한가, 돌아보게 되었다. 깨끗하게 비어 있으면 그런대로 포기하면 그 뿐인데 그렇지도 않고 곡간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는 것이 있다. 희곡 몇 편과 책 두세 권이 뒹군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논문도 몇 편 발에 밟힌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화가 난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았다거나 여름에 김을 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의 결실이 초라하다는 자책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작품을 쓰지 못하고 겨울을 맞게 되었다는 생각이 불러온 분노였다.

분노의 근거에 대하여 좀 더 원인을 규명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겨울이 오면 담담하게 동면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젊어서 바삐 살았는데 동면하게 되면 얼마나 편안히 긴 잠을 잘 수 있는가. 동면은 영원한 휴식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데, 중환자실 침대에 누우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부글거린다. 화가 난다. 작품 한 편은 더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특정 캐릭터와 장면도 그려 놓았다. 연결시키고 꾸미고 다듬으면 된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 않다. 원고지 한 두 장의 정리로 완료될 일이 아니다.

충분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희곡 한편을 완성하려면 양으로 이백 자 원고지 삼백 매는 채워야 한다. 사람 수백 명을 앞에 놓고 두 시간 동안 집중하게 해야 된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성격과 상황과 어울리며 논리를 펴며 플롯을 전개시켜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평상시나 젊은 시절의 집중력이라면 희곡 한편을 집필하는데 여섯 달이나 일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게 일 년이란 시간의 여유가 있을까. 정신 상태는 온전할까. 중환자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간 수술 환자에게 허락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2014년을 넘기지 않고 가을에 퇴원했다. 시골에 돌아 와서 바깥 생활도 하고 집에서는 쉬면서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는데 온통 정신은 쓰고 싶은 작품에 쏠려 있다. 작품이 전개될 공간을 정한 다음, 캐릭터를 그려 나갔다. 주인공을 바닷사람으로 하고 그의 행동을 묘사하니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퇴원 후의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서울 병원에 들른 길에 관람객을 많이 모은다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과 <국제 시장> 주인공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데 어쩌면 두 사람은 이렇게 다르게 살고 있을까? <국제 시장>은 감동을 만들어 내는데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감동이 없다.

병실 천정 아래 TV가 걸려 있는데, TV 화면에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세월호의 거대한 몸이 오랫동안 방영되고 있었다.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의 주 무대도 동해한 포구에 좌초되어 있는 만 톤급 화물선이 아닌가.

내 희곡 첫 장에 등장하는 핀란드 여인은 오십대를 바라본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딸이 하나 있다. 그는 오십대 전에 중요한 결심을 한다. 젊어서 남편과 딸에게 충실했으니까 이제부터 자기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한다. 남편과 이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별하자고 한다. 지금부터 남편과 딸을 위한 생활을 정리하고 자기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한다. 그녀의 후반기 삶은 지상 낙원 핀란드에 있지 않고, 아프리카에 있다고 한다. 그녀는 아프리카에 가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좀 더 많은 어린이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한다.

예상치도 않았던 메르스가 침범해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에도 메르스 환자가 생겼다고 한다. 민심이 심상치 않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메르스와 민심을 등지고 작품을 써 내려갔다.

나는 아직도 원고지에 볼펜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자연히 컴퓨터에 익숙한 사람의 손을 거쳐야 다른 사람에게 깨끗한 원고를 넘길 수 있다. 올해 7월 말일이 되어서야 A4지에 옮겨 앉은 내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태풍>이다. 원고를 정리해 주고 타이핑해 준 작가 지망생 손양이 입을 열었다. “이번이 세 번째예요.”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공연하려면 대본의 허점이 더 많이 보일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속으로 일단 이것으로 끝내자. 희곡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웃거리는 극단 관계자들도 찾아온다. 나는 그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텅 빈 곡간에 쌓아둘 비축미로 쓴 것이지, 공연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화물선, 파나마 스타호는 동해안에 좌초되어 태풍을 맞고 있다. 태풍은 중심 세력이 초속 오십 킬로 이상인 대형이다. 바다 속에선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선 폭우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따지고 보면 동해안 갯바위에 올라앉은 조난당한 화물선은 한반도다. 한반도 앞으로 밀려드는 태풍으로부터 배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골몰해 본다.

핀란드 투르크에 살고 있는 오십대를 바라보는 여인은 사랑하는 딸과 남편과 이별하고 아프리카에서 어린이들을 돕겠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지만 북구 사람들 중에는 간혹 있다. 정년퇴직을 하고 제2의 생을 살겠다고 봉사의 길을 택하는 것은 북구인들의 문화다.

문화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가치의 표상이 드러난 형태다.

나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로 우리 앞으로 밀려오고 있는 태풍을 막거나 밀어 내려고 하지 않고 우리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윤리로 우리의 재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 오히려 쉽게 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이 가을에 겨울을 보낼 양식 한가마니를 창고에 쌓아 두었다.

그래서 신은 이 가을도 바쁘게 보낸 것 같다. 문제는 신이 생각하기에 이 가을이 나의 진정한 가을이 아니라는데 있는 것 같다.

<태풍>울 마치고 돌아 서니 병원에서 몸이 수술 전보다 건강해 졌다고 한다. 나는 창고에 쌓아둘 또 하나의 수확물을 마련하기 위해 답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결국 신이 한가하게 쉴 날은 없을 것 같다.

 

201581

盤古堂에서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 글로써 세상을 흔들다 - 이정배 성서와문화 2016.05.20 1509
19 광복절과 한글날 - 정종화 성서와문화 2016.05.20 1404
» 가을 앞에서 - 이반 성서와문화 2016.05.20 1665
17 마음을 가꾸는 시 - 임인진 성서와문화 2016.05.20 1518
16 추석과 추수감사절 - 홍정호 성서와문화 2016.05.20 1635
15 감사 - 이주연 성서와문화 2016.05.20 1469
14 하나님의 예술과 복음적 실존 - 유동식 성서와문화 2016.05.20 1612
13 한 걸음이 곧 인생이다 - 김기석 성서와문화 2016.05.20 1517
12 사람이 낸 길에는 유턴이 있지만(외) - 이현주 성서와문화 2016.05.20 1456
11 꽃비 내리는 날 - 임인진 성서와문화 2016.05.20 1492
10 시몬느 베이유가 만난 예수 - 이상범 성서와문화 2016.05.20 1486
9 예술목회이야기(1): 마르크스주의 우파와 한국교회 - 손원영 성서와문화 2016.05.20 1591
8 제사보다 먼저 화해를 - 손규태 성서와문화 2016.05.20 1552
7 음악의 출발 - 김순배 성서와문화 2016.05.20 1444
6 그 때가 되면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6.05.20 1545
5 광복70년과 한국교회 - 강근환 성서와문화 2016.05.20 1485
4 광복 70주년의 축복과 과제 - 유동식 성서와문화 2016.05.20 1570
3 바통을 잇는 <성서와 문화>호의 방향타 - 김경재 성서와문화 2016.05.20 1700
2 거룩함과 아름다움: 계간 <성서와 문화>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 박영배 성서와문화 2016.05.20 1587
1 속간(續刊)에 부치는 글 - 이계준 성서와문화 2016.05.20 1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