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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꾸는 시 - 임인진

성서와문화 2016.05.20 19:50 조회 수 : 1516

 

가을의 기도祈禱

김 현 승 (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을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마음을 가꾸는 시 > 

             

임 인 진 (시인)

 

? 가을 들녘에 앉아 한 편의 시에 가슴을 적신다.

시 속에는 그동안 무심히 잊고 지내왔던 길이 보인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 나를 찾아나서는 길 하나 열려있다.?

을빛 은행잎이 한 닢 두 닢 발길에 채입니다. 사뿐사뿐 빈손으로 내려앉아 바람결에 몸을 싣는 낙엽을 보노라면 숨 가쁘게 달려오며 무엇인가 꼭 움켜쥐었던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이맘때면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시인의 기도시를 홀로 읊조려 봅니다. 너 자신을 채우고, 가꾸며, 비우라고 간곡히 일깨워주는 글발입니다. 기도와 사랑과 고독으로 이어지는 간절한 기구(祈求)를 가슴 깊은 곳에 담아보라고 차근차근히 귀띔해줍니다.

지닌 것 훌훌 털어 가벼워지고 싶었는데, 서서히 허허로움이 스며드는 가슴이었는데,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의 파문(波紋)이 일기 시작합니다. 이 감동의 메아리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녘 풀벌레소리에 잠 못 이루는 이에게,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도 눈물짓는 이에게, 진흙 밭에서 질척이듯 삶의 갈피를 못 잡아 허덕이는 이들에게, 눈을 뜨고도 눈앞을 가늠치 못해 갈팡질팡하는 군상들에게 공허한 울림이 아닌 영혼의 불 밝혀주는 메아리로 울렸으면 좋겠습니다.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로 시인은 신앙적 소명감과 아울러 삶에 대한 진지한 각오와 깊은 성찰(省察)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겸어한 모국어란 어휘가 마음을 찡하게 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낮추던 말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새댁이 시집오면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존칭과 존댓말로 일관했으니까요. 그것이 상용어로 돼버린 옛 여인들의 말과 글은 겸손(謙遜) 그 자체였습니다.

모국어란 민족의 문화유산인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지요. 역사의 수례바퀴 속에서 일본어의 한자식 표기로 변형된 말과 외래어의 남용 때문에 순수한 우리말과 글의 참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하겠습니다. 모국어를 위한 새로운 인식과 애착을 지녀야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시인의 염원가운데 가장 핵심적 열망(熱望) 사랑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귀한 열매를 가꾸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울 수 있겠습니까? 온갖 정성 다 바쳐 가꾸는 시간 안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은 또 다른 작품에서 가을은 눈이 맑아지는 계절이라고 했습니다. 가을의 눈부심을 신앙적 차원으로 감지한 시인의 영혼은 드디어 고독의 경지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른 까마귀같이오묘한 섭리의 세계,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스스로 채우고 가꾸고 비우는 것으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진정성과 해맑은 투명성을 동반한 가을의 기도시 한 편으로 우리 모두의 눈이 맑아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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