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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이 곧 인생이다 - 김기석

성서와문화 2016.05.20 19:43 조회 수 : 1517

한 걸음이 곧 인생이다

 

김기석 ? 청파교회 담임목사문학

 

구직자들이 회사에 자기를 소개하기 위해 쓰는 문서를 일러 이력서(履歷書)라 한다. '신발' 혹은 '밟다'는 뜻의 '''지내다' 혹은 '겪다'라는 뜻의 '''기록하다'는 뜻의 ''와 결합된 말이다. 지금까지 내 발이 지나온 흔적의 기록이 곧 이력서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이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발자취'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신체 부위 중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 늘 대지와 접촉하고 있는 발은 삶 전체를 나타내는 멋진 환유(換喩)이다.

동화 <신데렐라>에 나오는 왕자는 파티에서 유리 구두 한짝만을 남기고 사라진 그 멋진 아가씨를 찾기 위해 온 나라를 다 뒤진다. 왕자의 아내가 되고 싶은 여인들은 다 그 유리구두를 신어보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우리는 그 유리구두의 주인이 평소에 나막신을 신은 채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등 허드렛일을 하던 신데렐라의 것임을 잘 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아가씨'라는 뜻이다. 유리구두는 한 존재를 알아보기 위한 인식의 근거였던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살리아의 영웅 이아손은 '모노산달로스'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사나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물이 불어난 강을 못 건너 발을 동동 구르던 노파를 업어 건네주다가 신발을 한 짝 잃어버렸던 것인데 모노산달로스야말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신명기 법전은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 죽은 이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고 남편의 형제와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죽은 이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무를 수행할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여인은 그 죽은 남편의 형제를 장로들 앞에 데려가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야 했다(25:5-10). 그리고 치욕을 당한 그와 그의 집안은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여기서 신은 한 존재의 정체성과 존엄을 나타내는 기표일 것이다.

불붙는 떨기나무에 앞에 선 모세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는 음성을 듣는다. 모세가 벗어야 했던 신은 무엇이었을까? 광야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날카로운 가시와 광야에 득시글거리는 독사와 전갈로부터 자기를 지켜주던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보호의 철폐를 의미한다. 그는 마치 껍질을 잃어버린 달팽이처럼 연약한 존재 그 자체로 야훼 앞에 서야 했다. 그런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소명이 주어질 수 없음인가?

고통을 겪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발 앞에 와서 엎드렸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발치에 앉았다. 죄를 지은 한 여자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에 서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매우 에로틱한 광경이다. 그런가 하면 집을 떠났던 아들을 맞아들인 아버지는 종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도록 했다. 품꾼이 되기를 청한 아들을 다시금 아들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발을 존재의 환유로 본다면 예수가 닦고 있었던 것은 미구에 그들이 겪게 될 고통과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발을 내려다본다. 걸어온 생의 자취만큼이나 곡절 많은 발. 존재의 무게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발을 연민의 마음으로 쓰다듬다가 정호승의 <발에 대한 묵상>을 조용히 읊조려본다. "저에게도 발을 씻을 수 있는/기쁜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여기까지 길 없는 길을 허둥지둥 걸어오는 동안/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뜨거운 숯불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하고/절벽의 얼음 위를 허겁지겁 뛰어오기도 한/발의 수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이제 비로소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발에게 감사드립니다". 뒷부분에서 시인은 그동안 다른 사람의 가슴을 짓밟지 않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지금 발밤발밤 내딛는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가? 그 한 걸음이 곧 인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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