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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리는 날 - 임인진

성서와문화 2016.05.20 19:42 조회 수 : 1489

꽃비 내리는 날

임인진 ? 시인|문학

비가 내린다.

비바람에 내몰린

목메도록 가슴 저린 이들의 설움이

비에 젖어 내린다.

 

빗물에 잠겨 떠밀려가는

꽃잎의 흐느낌 소리

 

옛날 어머니 반짇고리에 고이 담겼던

서간문(書簡文)의 눈물자국 같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꽃잎들의 잠적(潛跡)

 

저리도 쉬이

하얗게 하얗게

모두 떠나가는 것을

-졸시꽃비-

 

희뿌연 미세먼지 속에서도 꽃들은 눈을 뜬다. 모진 겨울바람에 기죽어 느즈러진 영혼들을 일깨우려는 듯 앞 다투어 눈을 뜬다.

담장 밖 영춘화(迎春花)) 가지의 작은 봉오리들이 아스스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르륵 꽃가지 흔드는 바람소리, 주렴처럼 길게 늘어진 가지들은 저마다 노릇노릇한 꽃 너울을 둘러쓰고 살래살래 몸을 휘젓는다.

밤새 창문에 비췬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둘리는가 싶어 아침 일찍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불청객 비바람이 영춘화 넝쿨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미처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산산조각으로 흐트러뜨린 가지가 잘리어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흩어진 꽃잎과 잘린 가지를 쓸어 모으면서 뻥 뚫린 듯 허전한 가슴을 함께 쓸어내려야 했다.

하찮은 일 같지만, 때때로 우리는 자연에서 인생을 배운다. 꽃이 피고 지고 비바람에 흩날리며 물에 씻겨 떠내려가는 것, 그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순환 법칙이며 우주의 섭리인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에 젖어 떠밀려가는 꽃잎을 보면서 왜 이리도 가슴 미어지도록 울고불고 하는 것일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다. 만물이 소생하고 희망이 넘치는 4월을 일컬어 비정하고도 참담하기 그지없는 잔인(殘忍, Cruelest)이란 형용사로 우리를 아프게 하는 시인이 원망스럽다.

T. S. 엘리엇(1888~1965)1922년 발표한 연작시 황무지(荒蕪地,The West Land)에서 제 1차 세계대전 후, 선악에 대한 의식마저 잃어 불모지처럼 돼버린 현대인의 정신적 공황(恐慌)상태, 즉 메마른 황무지에서 다시 솟아날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의 고뇌(苦惱)를 상징적 표현으로 읊은 것이다.

그 같은 시적 이미지의 암시(暗示)가 오늘 우리에게 닥친 예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앞에 벌어진 끔찍한 일은 자연의 재해가 아닌,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불의(不義)와 불신(不信)과 탐욕(貪慾)의 몹쓸 짓거리인 것을 어쩌랴. 백령도 앞바다에서, 진도 앞바다에서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며 생각을 안으로 깊이 여물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비롯된 말일 것이다. 남이 슬퍼하면 같이 울어주고, 남이 아파하면 곁에서 위로와 도움을 주며, 남들이 기쁘고 즐거울 때 함께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평생토록 마르지 않는 감성의 샘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계절의 순환에 기대어 영혼을 밝고 맑게 살찌우며 숨이 멎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갈 일이다.

바야흐로 온 강산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일 것이다. 바람 부는 날, 하얗게 벚꽃 날리는 꽃길을 살금살금 걸어보자. 흩날리는 꽃잎을 온 몸과 얼굴에 함빡 뒤집어쓴 꼬마들의 깔깔대는 소리, 그 환성에 어찌 웃음이 솟지 않겠는가.

오래 전, 하얗게 배꽃이 질 무렵엔 어김없이 보슬비가 내렸다. 두 손으로 우산대를 꼭 움켜잡은 아이가 커다란 코고무신 끌고 조촘조촘 마당가 배나무 아래를 오갔다. 기름먹인 종이우산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꽃잎을 마루 끝에 쏟아놓으며 해해거리던 일이 엊그제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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