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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되면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6.05.20 19:39 조회 수 : 1545

그 때가 되면

 

최종태 ? 서울대 명예교수미술

 

세상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고 사람의 일생이란 것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나이 먹으면 병들고 죽는 길로 간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그런 원리하고는 다른 것 같다. 늙어가면서 육체는 쇠퇴하지만 정신의 세계는 더 높아지고 더 넓어지고 더 알차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잘 살기만하면 비록 육체는 때가 되어 없어지지만 정신은 그것과 같이 가지 않기 때문에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불가에서 흔히 하는 얘기가 육신은 옷과 같아서 헐면 벗는 것이고 정신은 영원하여 죽어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어쨌거나 한 세상 만나 사는 것인데 몸을 잘 간수하고 정신을 잘 보전해서 썩지 않는 도리를 깨달아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보람일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그 사는 의미가 먹고 사는 것만이 다 라고 한다면 서글픈 일이 아닐까. 마음 가득히 사는 즐거움만 있으면 뭐를 더 욕심내랴. 풍성한 반찬과 맛있는 음식이 밥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활동하는 그 끝없는 세계의 한량없이 넓은 마음 곡간 안에 더 좋은 게 있기만 하다면, 누가 그 곳을 마다할 것인가.

언젠가 내가 전시회를 열어놓고 마침 그 곳에 있을 때 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이렇게 물었다. "내 머릿속이 요새 조용해졌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랬더니 그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구하는 바가 없으면 자유로워진다 합니다." 그 순간 옳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안 갔지만 어쨌든 궁금증이 깔끔하게 풀린 것이었다. 그 제자는 옛날 학교 다닐 때 불교학생회 회장을 지낸 사람이고 이일 저 일로 해서 불교를 연구하는데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구하는 바가 없으면 자유로워진다. 그 말뜻을 나는 잘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그 때 나의 의문이 훨훨 날아간 것만은 사실이다. 훗날 그를 다시 만나서 그때 자네가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지?” 하고 되물었는데 실은 그 사람은 말을 해 놓고도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 한 사람은 무심코 한 것인데 나는 정통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내용인즉 이런 이야기이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드는 게 내가 전공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평생을 하고 있는 일인데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루 종일 그러기를 평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의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과거의 그림들을 보고 생각하고, 세계의 역사 구석구석을 뒤져서 그 그림들을 보고 생각한다. 자다가도 일어나 생각하고, 일하면서도 생각하고, 길가면서도 생각한다. 그런 일로 세계미술사를 하루에도 수 십 바퀴를 돌았다. 생각으로 말이다.

앞서 한 얘기의 골자인즉, 내 머릿속이 요새 조용해졌다한 그 말은 그런 머릿속 활동이 조용해졌다는 말이었다. 그 제자의 말인즉 조용해지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정말 옳은 말이었다. 내 마음이 남들의 일로 번거로우면 내가 자유로울 수가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림은 내 맘대로 누가 뭐라 해도 내 뜻대로 내 붓 가는대로 그려야한다.

저 풀들을 보라. 저 나무들을 보라. 얼마나 고요하게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 정작 제 맘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기위한 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불가에서 해탈이란 말을 한다. 해탈한다면 무엇이 보일까. 더러운 때를 벗고 나면 깨끗한 것이 보일 것이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면 밝은 곳을 볼 것이고, 나쁜 데를 벗어나면 좋은 것을 만날 것이고, 다툼을 벗어나면 평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누가 벗겨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자유는 항복에서 온다. 이것은 내가 터득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날 그냥 그렇게 보인 일이었다. 항복하면 포로가 되는 것인데 어떻게 구속되고서 자유를 얻겠는가. 역사를 다 수용하고 승복하는 것. 아기가 엄마 젖을 물고 잠자고 있을 때. 그것보다 더 온전한 상태를 항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아기는 엄마와 아직 하나이다. 고통은 둘에서부터 시작된다. 둘로부터 시작해 수()의 끝을 넘어가면 영원과 만나서 자유일 것 같다. 진정한 그림은 거기에서 전개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는 여러 스승들이 있었다. 스승들은 그때그때 나의 틀을 깨서 넓은 세계로 열어나가도록 도와주었다. 중국에 한 속담이 있는데 ?줄탁동기(?啄同機)?라 해서 어미닭이 달걀의 부화를 돕는다는 말이다. 달걀 안에서 기척을 해야 어미닭이 부리로 쫀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잘 비유한 말이다. 한 스승이 세상 뜨셨을 때 등받이 나무가 갑자기 빠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기댔던 탓인지 삼년간이나 뒤가 허전하였다. 또 한 스승이 갔다. 그렇게 해서 내가 혼자가 되었다. 둘러보니 내가 큰 벌판에 혼자 서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넓어졌다. 세상은 아직도 어둡고 먼동은 트이지 않았다. 그 무렵에 만난이가 김수환 추기경하고 법정 스님이었다. 김 추기경한테 물었다. 내게 좋은 스승들이 있었는데 다 가시고 기댈 데가 없어서 심심하다 그랬다. 그 때 "하느님 하고 놀면 된다." 그러셨다.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셨다. 두 분이 또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나는 다시 망망대해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저 분들의 죽음은 이쪽에서 저쪽에로 자리바꿈하는 절차로 보였다는 것이다.

예술과 인생과 자유와 진리와 그런 풀리지 않는 큰 숙제를 안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내일도 오늘과 같이, 그리하여 물안개로 가득 찬 그런 벌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다시 누구와 만나랴. 이제는 진정으로 혼자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의지할 데라고는 하느님 밖에 없다.

예술이란 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참 많이도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해도 해결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는데 그 찰나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환한 답이 왔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서 터득한 일이 아니고 그냥 얻은 것이었다. 그 때 말 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그랬어도 나는 또 생각했다. 습관이 된 그것은 갑자기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동력이 떨어져도 기차가 얼마큼 가서야 멈춰서는 것처럼. 이제는 내 안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를 동력 삼아야한다. 이제 나의 기차는 내부의 자유공간을 달려야한다. 철로를 벗어나서 끝없는 하늘을 달려야한다.

나의 큰 스승 김종영 선생이 마지막으로 나한테 남긴 말씀이 ()과의 대화가 아닌가. 삼 십 몇 해가 지난 지금에서야 그 뜻을 알듯 싶게 되었다. 왕희지가 했다는 말 "아 이것을 일러 신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김 추기경이 하신 말씀 "하느님하고 놀아라." 이 세분의 말씀이 합쳐져서 하나의 목소리로 들린다. 지금은 그냥 신묘한 소리로만 들리지만 얼마 있으면 뜻으로 들리고 또 모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과 속()이 하나로. 그리하여 그 때가 되면 분화되지 않은 신세계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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