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5년 성서와 문화

포인세티아와 셀렘 - 최종순

성서와문화 2016.05.20 20:01 조회 수 : 1798

포인세티아와 셀렘

 

최종순 (수필가)

 

또 한 해가 저문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다 못한 채 해를 넘기는 것 같아 공연히 심란해진다.

뒤적이던 신문을 접고 일어선다. 화들짝 일어나긴 했지만 그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다.

갑자기 공허하고 쓸쓸한 생각에 현관문을 나선다.

무작정 어느 만큼 걷다가 꽃집으로 향한다. 낯익은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출입문을 들어서자 바로 현관 앞에 화사한 화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포인세티아, ! 이거다. 집안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거실 오른쪽 흰 기둥 벽이 허전하여 시계도, 달력도 걸어 보았지만 마땅치 않았던 터인지라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떠오른다. 그곳이라면 희색과 어우러져 실내가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이리라.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온갖 장식을 하기 마련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나 카드 진열 등으로 연출해 보기도 하지만 대표급은 역시 포인세티아가 아니던가. 나도 연말연시 손님을 환하게 맞이하고 싶어진다.

꽃집 아주머니는 내가 기뻐하는 걸 묵묵히 바라보더니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이 붉은색은 꽃이 아니라 잎이라고. 화훼 농장에서 화학 약품을 이용하여 붉은색으로 변조시킨 것이며 이것은 2~3개월이 지나면 다시 본연의 색으로 변한단다.

머지않아 내가 실망할 것을 미리 읽고 크리스마스 한철을 노리는 농민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게 아닌가. 푸른 잎을 둔갑시키는 그들의 기술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붉은 꽃 모양이 잎이라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오래 가지 않는다는 말에 심드렁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잎이라고는 하나 붉은색이므로 꽃같이 곱고 모양도 꽃 모양과 다를 바 없어 선뜻 마음에 당겼다. 누가 이 화초를 꽃으로 보지 않으리. 꽃이든 잎이든 내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탐스럽게 활짝 핀 붉은 잎이 꽃으로 보이면 꽃인 것이지 굳이 잎이라고 군색하게 말하긴 싫다. 비록 벌과 나비는 날아들지 않을지언정 꽃은 꽃이로다.

눈을 돌리니 재미있게 생긴 화초가 눈에 띈다. 생김새가 귀티 나고 가지가 멋있게 뻗은 것이 멋쟁이다. 잎은 도톰하고 톱니 모양이다. 처음 보는 화초다. 원산지가 싱가포르인가 필리핀인가 하던데 셀렘이란 명패를 달고 있다. 호감이 가는지라 흥정을 하니 거금을 요구한다. 내심 그러면 그렇지하고 중얼거리며 왜 그리 비싸냐고 되물으니 50년 묵은 골동품인지라 그 진가를 갖고 있다 한다. 한술 더 떠 그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만이 임자란다.

TV진품 명품프로그램에서 오래된 골동품일수록 고가였음에 수긍이 간다. 그러나 이 셀렘이 진품인지는 감정받을 길이 없어 모든 것을 덮어 두고 집으로 끌어왔다. 내 형편엔 고가이지만 마음에 끌린 이상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었다.

새로 이사온 이 동네에 나이 지긋한 노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여생을 공기 맑고 쾌적한 환경에서 보내길 원한다. 나 또한 이 부류에 속한다. 자식들은 서울을 벗어난 것이 못내 아쉬워 교통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되돌아가고 있다. 남들은 식구가 없어 쓸쓸하다며 애완용 동물을 많이 기른다. 족보 붙은 강아지에 앙증맞은 옷을 입혀 햄과 당근 조각으로 주식을 챙기고 아담한 집을 거실 한 모퉁이에 마련해 놓고 애지중지 기른다. 어떤 이는 고양이를 기르는 이도 있다. 강아지는 귀가 예쁘고 하는 짓이 귀여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 데나 배설하고 어지럽게 늘어놓는 것이 신경 쓰이고 고양이는 털이 빠지고 냄새가 나며 눈에 살기가 있어 싫다.

하지만 화초는 어떤가. 항상 제자리를 지키며 보는 이를 즐겁게 해 주고 있으니 관상용으로는 제격이다. 각기 다른 품위와 향기, 색깔, 숨쉬는 모습, 느낌, 교훈까지 정겹게 다가온다.

포인세티아와 셀렘, 이 두 화분을 서로 엇갈리게 놓고 한가한 시간이면 어린애 다루듯 잎의 먼지를 닦아 주고 물을 주며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꽃집을 찾아갈 때의 울적하고 허전한 마음을 고스란히 앗아가 버리고 만다.

한 달 남짓 됐을까? 포인세티아의 꽃잎 속에서 또 다른 작은 잎이 뾰족이 솟아나며 붉은색을 예쁘게 띠고 있다. 셀렘 또한 무심하고 소홀했던 기간에도 또 하나의 생명 키우기로 새촉을 틔워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비록 꽃을 피우지 못하나 생명력이 유달리 길어서 초록빛의 셀렘을 바라보는 나의 기쁨도 그만큼 길어질 것 같다. 요즈음 나의 하루는 베란다에 나가서 화초들과 눈을 맞추고 안녕하고 인사로 시작한다. ‘포인세티아와 셀렘이 있기에 나의 아침은 더욱 활기차고 사랑이 넘친다. 잎과 잎이 서로 맞붙어 있으면 떼어 주고 줄기가 굽어 있으면 제 방향대로 펴준다. 두 화분을 엇갈리게 방향을 틀어놓은 이유도 이쪽저쪽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게 될까 봐 잎이 편하게 자라도록 배려한 것이다. 말 못하는 화초들도 자기 몸이 다른 가지에 닿는 것을 싫어하리라는 내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오늘은 외출에서 돌아와 맨 먼저 화분을 목욕탕으로 옮겼다. 며칠 전 양동이 가득 받아 정수된 물로 시원하게 목욕을 시키고 물도 흠뻑 주었다. 흙 내음이 물씬 풍긴다. 비록 꽃향기는 아니나 흙 냄새도 나쁘진 않았다. 이 신비스런 생명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이 숨소리를 들으며 말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목욕을 하니 시원하지, 예쁘게 자라 줘서 고맙다.’고 살며시 말을 건네면 그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우쭐우쭐 몸을 일렁인다.

대가족 제도 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시끌벅적하게 지내던 시절이 그립다. 자식이 독립해 자신의 인생을 엮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왠지 서운하고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낀다.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니지만.

효도란 게 별건가 부모 마음 편안하게 해주면 효도지. 이제 우리 집은 딸의 몫은 포인세티아, 아들의 몫은 셀렘이 톡톡히 해내고 있다. 다정한 효녀 효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겨울 쓸쓸한 연말을 포인세티아와 셀렘이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길이 길이 사랑을 나누리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 이형규 성서와문화 2016.05.20 1786
39 둘이 아닌 하나 - 남기수 성서와문화 2016.05.20 1760
» 포인세티아와 셀렘 - 최종순 성서와문화 2016.05.20 1798
37 기독교와 나라사랑(1): 기독교 민족 운동의 성좌, 전덕기 목사 - 고성은 성서와문화 2016.05.20 1905
36 찬트(chant)와 트로프(trope) - 김순배 성서와문화 2016.05.20 1846
35 문학에 비친 복음(1): 요셉 이야기 - 이상범 성서와문화 2016.05.20 1856
34 웬 은혜인가 ! - 이양자 성서와문화 2016.05.20 1868
33 뉘른베르크 '교회의 날'(Kirchentag)의 경험 - 김윤옥 성서와문화 2016.05.20 1729
32 영원으로 가는 깊은 밤 - 정연희 성서와문화 2016.05.20 1874
31 아기 예수를 경배하다 - 김학철 성서와문화 2016.05.20 1868
30 희망 없는 시대에 듣는 예수 소망,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 김혜옥 성서와문화 2016.05.20 1888
29 소설에서 발견한 성탄 메시지(혹은 Touch!) - 이문균 성서와문화 2016.05.20 1805
28 동지(冬至)와 성탄과 새해 - 유동식 성서와문화 2016.05.20 1854
27 나의 성서적 신앙 - 오정환 성서와문화 2016.05.20 1693
26 가시 - 이찬수 성서와문화 2016.05.20 1796
25 2015년 여름나기 - 권미경 성서와문화 2016.05.20 1878
24 경복궁(景福宮)에 얽힌 이야기 - 김효숙 성서와문화 2016.05.20 1917
23 세 종류의 음악 - 김순배 성서와문화 2016.05.20 1533
22 그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 - 김경재 성서와문화 2016.05.20 1949
21 예술가들의 이야기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6.05.20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