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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 이찬수

성서와문화 2016.05.20 19:54 조회 수 : 1793

가시

-출애굽기 3,1-6-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학)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장편 서사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길가메쉬는 지금으로부터 47백 여 년 전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를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왕이다. 이 서사시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과 구조가 거의 같은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대학 시절 이 서사시를 읽으면서, 대홍수 이야기가 성경만의 유일한 기록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두루 전해져오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성경의 절대성에 회의를 품던 기억이 난다.

이 서사시에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가 죽자 세속적 가치의 허무함을 느끼고는 생사의 비밀을 알고 싶어 대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설적인 사제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그로부터 신의 비밀을 듣는다. 우트나피쉬팀이 말한다. “가시덤불같은 식물이 하나 있는데 ...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다.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

길가메쉬는 신의 선물인 영원한 젊음(영생)을 얻으려 깊은 물속에서 가시에 찔려가며 가시나무를 손에 움켜잡고 물 밖으로 나온다. “손은 찔렸지만 식물을 움켜잡았다.” 그는 가시나무를 우루크의 성으로 가져가 늙은이들을 젊게 만들어주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우루크로 돌아가던 중 샘에서 목욕하는 사이 뱀이 나타나 그 나무를 몰래 물어간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시나무를 고대 아카드어로는 엣데투’, 히브리어로는 아타드라고 한다. 가시나무를 가리키는 다른 히브리어는 스바크이다. 고대 히브리인의 이름 가운데 스바크야후? 야훼는 나의 스바크(가시나무)이시다 ? 라는 이름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시나무는 신의 상징처럼 쓰였다.

가시나무와 관련된 또 다른 히브리어가 스네이다. ‘아타드가 키가 큰 가시나무라면, ‘스네는 좀 작은 가시덤불이라고 한다. ‘시나이산과 어원이 같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떻든 신이 거하시는 곳이 스네’, 가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신앙적으로 볼 때도 의미가 적지 않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가 광야에 나갔다가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나무(스네)를 만난다. 우리말로는 그 나무를 떨기나무로 번역하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가시덤불/가시관목으로 옮겨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공동번역에서는 야훼의 천사)가 가시나무 속에서 불꽃으로 나타났고, 하느님이 가시나무 안에서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가시가 신이 출현하는 상징처럼 쓰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대 근동에서 가시(나무)는 신적 신비를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여기에는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다. 신을 만나려면 가시’, 즉 상처와 아픔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길가메쉬가 손은 찔렸지만 식물(가시나무)을 움켜잡았다고 했을 때에도 신은 아픔 속에서 만나지는 분이라는 통찰이 들어있다. 상처와 아픔 없이는 신을 만날 수 없다.

그 전형적인 모습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머리에 쓴 가시관에서 볼 수 있다. 가시덤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스네를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어 바토스로 옮겼는데(마가복음 12,26 참조),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이 바로 이 바토스로 만든 관이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는 과정에 가시덤불로 된 관을 머리에 썼다는 것에는 극단적인 아픔과 상처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어린 아이가 여러 고통과 아픔을 겪어가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도 비슷한 구조를 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치 않게 생기는 상처와 아픔을 잘 견디고 소화해야 진짜 어른이 된다. 신앙의 어른은 더욱더 그렇다. 종교적 천재들은 아픔의 깊이 혹은 아픔의 미래를 성찰하면서 아픔을 구원의 길로 승화시킨 이들이다. 아픔이 신을 만나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이미 본대로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자(천사)가 가시나무 속에서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느님은 가시나무 속에서 말씀하신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하느님은 가시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그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선포한다. 종교적 전채들은 아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면서 그곳에서 개인과 인류를 구원하는 진리를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아픔 없는 신앙은 아주 미약하거나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 된다. ‘가시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깊게 만나고, 사회적으로 정의를 세우는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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