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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일지老年日誌

성서와 문화 2013.12.18 21:09 조회 수 : 2278

[최 종 태 ·조각가 / 예술원회원]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 언젠가 파리에 갔을 때 친구 만나서 그 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하자 그랬다. 변두리 아주 보잘것없는 다리였다. 강물만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내 마음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마냥 흐르고 있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할머니도 가고 어머니도 가고 삼촌들도 다 가고 나만 여기 남아 있다.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늙고 점점 혼자가 된 것을 실감하고 있다.
손자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옛날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할머니,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된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딸이 커서 대학생 엄마가 되고 아들이 커서 고등학생 아빠가 되었다. 세느강이 흐르고 나는 미라보 다리 위에서 세월이 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로 무상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시작된 것은 끝이 있다. 나의 지금은 끊임없는 내일을 맞으면서 끝나는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의 현재는 자나간 날들과 앞으로 올 내일 사이에서 그 양쪽을 보는 것이다. 현재 또는 지금이라는 것은 볼 수도 없고 알아차린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내가 망치를 들고 돌을 딱하고 치는 순간만큼은 내가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닐까. 그림 그리는 이 순간만큼은 나의 현재를 사는 것이다.
나의 길이 있었다. 이르는 골목마다 스승이 있었다. 스승은 온데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그는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었다.
스승은 항상 위에 있었다. 높은 데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어릴 때는 그때대로 커서는 또 그때대로 이르는 골목마다에서 스승이 기다렸다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위에 있는 그런 스승들과 높은 데를 향해서 올라가는 생활에 길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올 것이 왔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서 그 심정을 이야기 하였다. 스승들이 다 가고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다 하였다. “하느님하고 놀면 된다” 해서 웃었다. 생각해 보니 진담이었다.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었다. 이를 데 없이 높은 곳. 이를 데 없이 큰 곳. 무한의 바다. 설명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내 마지막 스승이 조각가 김종영 선생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라치면 항상 스승은 한 수 위에다 답을 놓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높이 띠우는 것이 아니고 조금만 위에다 답을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만나서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침내 차를 한 잔 들기까지 한참이나 지나서 “신神과의 대화가 아닌가.” 하셨다. 천둥치는 소리 같았다. 그것이 김종영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런 뒤 어느 날 스승은 뜻하지 않은 병고가 생겼다. 그리하여 다시는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서른 해도 넘은 옛일이다. 이제사 그 말뜻을 알게 된다. 김추기경의 하느님하고 논다는 말과 같은 말씀이었다. 꿈속에서라도 선생님을 한 번 볼 수 있으면 … 그런 생각을 한다.
함박 눈발이 쏟아진다. 옛날 텔레비전에서 눈 오는 뉴스가 나올 때면 강원도 눈 구경 간다고 가슴 설레었지. 은행나무 아래로 노랗게 떨어진 파스텔 그림 같은 낙엽을 볼 때면 아릿한 낭만이 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태양을 볼 때에도 그 전 같은 감격이 없다. 사철에 번갈아 피는 꽃들을 보면서도 그저 그렇거니 한다.
미국에 사는 손자가 배 아프다하면 서울 할아버지 할머니 마음이 아프다. 요즘 딸네 집에서 두 개의 낭보가 날아와 집안에 모처럼 활기가 올랐다. 병원에 가는 날이 줄 서있다. 약 먹는 일도 깜박하면 잊어버린다.
모처럼 퇴직한 교수들을 초청하는 기별이 있었다. 몇 사람의 교수가 못 나갔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누구는 어디가 고장 나고 누구는 또 어떻고 80여년을 썼으니 기계가 고장 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 하였다. 걸어온 길 가야할 길이 한 눈에 보인다.
그림을 평생 그렸지만 끝이 없다는 것을 이제 사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안 보이는 것이고 그림은 형상일 뿐이다. 그것을 인제 사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모르는 것이다.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을 인제사 확실히 알게 되었다. 너무 늦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한 일이 얼마 만큼일까. 끝없는 평원에 논 한마지기쯤 일구었을까.
영원이란 무엇인가. 유한有限이 깨질 때, 의식의 틀이 깨질 때, 그럴 때 영원의 집 문이 열린다. 그림의 세계는 영원으로 연결 되여 있다. 그러나 화가는 끝까지 결말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원의 문턱에서 말이다.
완성이란 없는 것이다. 남들이 해놓은 작품을 보면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 작품은 아무리 노력해도 흠투성인 것이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이 시행의 착오였다. 오늘은 되겠지 하면서 하루를 살았지만 저녁이 되면 오늘도 안 됐다 하는 것을 확인하고 잠잔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왔다. 말하자면 오늘도 나는 실패하고 있다. 자코메티가 한 말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하나를 만들면 천이 나온다, 그 하나를 만들면 나는 조각을 안 할 것이다” 거룩한 모습, 선한 모습, 그런 것을 만들고 싶었다. 지나놓고 보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을 한다기보다 멈출 수가 없어서 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한 욕심이 있다. 천지가 확 트여서 저 끝머리까지 환히 보이는 날을 봤으면 좋겠다. 중국의 이가염李可染,1907~1989선생이 했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화가는 노년을 봐야한다.” 예술의 묘妙에 대하여 말 하는 것인데 결코 만만하게 봐서 될 일이 아니다하는 뜻으로 들린다.
길상사 관음상 만드는 일로 법정스님을 만났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랬더니 “불가에서는 그럴 때 독화살 얘기를 합니다.” 즉문卽問에 즉답卽答으로 그렇게 끝났다. 지금을 사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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