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3년 성서와 문화

[이 정 배 ·신학]


자속自贖이란 통상적인 서구 기독교의 시각에선 불가능한 개념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하기에 자유의지조차 긍정치 않았던 까닭이다. 하느님 은총의 결정적 계시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인 것이다. 해서 이웃종교인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자/타력自/他力, 유/무신론 등의 범주가 사용되었고 기독교의 배타적 우월성을 말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부터 서구의 대속代贖개념을 비판하는 일련의 신학자 그룹이 생겨났다. 동양적 기독교를 주창한 다석多夕 유영모는 말할 것 없고 그 제자 함석헌 그리고 한국 복음교회 창시자 최태용 같은 출중한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는 루터 종교개혁사상의 빛에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한 우찌무라 간조의 직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우찌무라 간조로 부터 루터의 칭의론稱義論을 배웠고 무교회주의에 매료되었으나 그와 달리 점차 이들은 한국적(동양적) 기독교를 생각했고 하느님 영靈의 직접적 역할에 주목했다. 일본적 기독교로부터의 탈주脫走가 대속사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적 기독교의 독특함을 예상케 한다. 물론 이런 경향성이 한국 주류교회의 담론으로 정착되지는 않았으나 최근 미국 등지에서 시작된 역사적 예수 연구의 흐름과 맞물리며 기독교 운동의 새 차원을 열고 있다.
주지하듯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초자연적 유신론의 틀을 입고 있는 성서의 예수상이 부활사건 이후의 고백적 증언 일뿐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함을 적시했다. 예수의 대속사상 역시도 기원 1세기 이후의 신학적 언술이라 하였다. 즉 십자가 행위는 인간 죄를 대신하는 수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열정의 표현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예수가 로마의 압제와 화석화된 유대 율법문화에 대한 저항의 결과인 한, 종래의 대속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불변하는 상수常數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대속론 역시도 문화적인 표현일 뿐 영원한 이념이 아니란 말이다. 多夕을 비롯한 일련의 자속自贖신앙의 주창자들 생각이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代贖대속’이란 종래의 케리그마를 해체하고 역사적 예수를 새롭게 의미화 하는 신학적 작업에 있어 공통점을 지녔다. 단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자본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서구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多夕의 경우 유불선儒彿仙의 정신적 에토스를 근간으로 했을 뿐이다.
자속적 구원은 결국 예수가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데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 우선 多夕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결코 하느님이 아니었다. 신인 양성兩性을 지닌 서구적 그리스도 신앙을 답습하지 않았으며 예수 역시도 미정고未定稿의 존재라 여겼다. 뜻을 품었으나 완전고完全稿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품은 뜻이란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사상의 줄인 까닭이다. 해서 多夕은 예수 숭배를 거부했다. 몸을 지닌 인간은 누구라도 탐지치의 삼독三毒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요한복음의 말씀(3:16)을 다석은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만이 하느님의 독생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인간 누구나가 외아들 일 수 있음을 강변했다. 여기서 독생자란 하느님이 사람 본성(마음) 속에 그처럼 될 수 있는 씨앗을 품수했음을 뜻한다. 불교가 불성佛性, 유교가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을 말하고 그리고 기독교가 하느님의 영靈을 강조한 것은 모두 인간이 제 맘속의 하느님 씨앗을 키워 하느님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자신 속에 탐진치의 몸만 있지 않고 하늘 씨앗(얼나)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붙들고 위(上)로 오르면 영생을 얻는 바, 이것이 자속적 신앙의 핵심이다.
多夕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자속 신앙의 전형이었다. 그가 예수를 효자, 얼사람 또는 천직天職을 위한 순교자로 언표 한 것도 모두 자속신앙을 본질을 일컫고 있다. 십자가 위(上)에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찾은 유일한 인간, 그가 바로 예수란 말이다. “예수는 믿은 이, 아바 아들 얼김(聖靈)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높낮(高低), 잘못(善惡), 살죽(生死)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참을 믿은 이, 말씀을 믿은 이, 한뜻 계심 믿은 이...” 이런 예수가 多夕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었고 이 스승을 ‘길’ 삼아 얼나로 솟구치는 일이 자속신앙이었다.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앙을 배운 바 있던 함석헌이지만 多夕의 영향 하에 그 역시도 대속신앙과 결별했다. 이는 함석헌의 주저主著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제목이 바뀌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루터식式 대속사상을 무교회주의를 통해 표현코자 했으나 대속론 그 자체를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더한층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위 책에서 함석헌은 계시종교의 틀을 벗어났고 기독교만이 참 종교일 수 없고 성경 역시도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천명했다. 모든 종교가 ‘알짬’ 되는 참에 있어서는 결국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보다 오히려 참(진리)이 더 위대하고 큰 개념이라 생각했다. 이런 전환을 통해 기독교 핵심 케리그마인 대속사상과 배타적 우월성은 자리할 곳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함석헌은 대속신앙의 한계를 다음처럼 정의했다. “...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었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代身을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에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와 내가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그 죽음은 내 육肉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영靈의 부활이 됩니다. 속죄贖罪는 이렇게 해서 성립됩니다.” 예수, 곧 진리와 하나 되려면 예수의 피만이 아니라 자신의 피, 곧 多夕의 경우처럼 얼나로 솟구치려는 白死天難자사천난의 고통이 필요하단 말이다.
함석헌은 이를 종종 ‘누에의 철학’이란 말로 비유하였다. 푸른 뽕을 먹되 자신 속에서 흰 실을 내뱉고 나비로 비상하는 누에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변화하는 생명의 신비(얼나)를 일깨우려 한 것이다. 여기서 누에가 품어내는 비단실은 예수의 말씀(진리)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말씀이 ‘제소리’가 된 상태를 일컫는 바, 자속신앙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렇기에 함석헌은 대속신앙을 타협 불가능한 진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런 자속신앙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민중 예수론’으로 발전시킨 것이 민중신학이었고 기독교 서구가 크게 주목한 바 있었다.
함석헌과 함께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생이었던 최태용 역시 제도적 은총에 근거한 대속 신앙의 한계를 이른 시기에 간파했다. <영靈과 진리眞理>란 잡지를 편찬, 전파하며 신학의 대중화를 꾀했고 복음교회를 시작했던 그는 교리. 제도가 아닌 영적 기독교 운동에 자신의 사활을 내 건 것이다. 성서마저도 영적 진리를 담은 상징으로 본 것은 당시로서는 탁견이었으며 더욱 기독교의 속죄론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에게 있어 해결되어야 할 긴박한 주제였었지만 자신의 시대에는 바울에게 임했던 영적 체험이 한층 더 소중하고 긴박한 것임을 말 한 것 또한 루터를 답습한 일본적 기독교와 큰 변별력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영적 기독교 운동은 오로지 신앙혁명을 통해서만 조선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기에 최태용은 교리에 안주하며 제도에 길들여진 당시 한국교회를 무교회주의 시각에서 비판하되 우찌무라 간조의 경우처럼 무교회주의를 신봉하지 않았고 ‘비非교회주의“란 이름하에 영적 기독교 공동체를 새로이 세우고자 했다. 영적 기독교 운동이 신비주의 사조로 변질 될 것을 우려하여 신앙공동체의 객관성 역시도 담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최태용의 代贖사상 비판은 일본 유학시절 동지였던 함석헌에 견줄 때 약화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달리 보면 신앙의 주체적인 면과 객체적 측면을 균형 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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