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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은덕을 기리며

성서와 문화 2013.10.10 16:30 조회 수 : 2797

[이 계 준 ·신학]

 


지난 6월 하순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목사님, 한승호 목사님께서 며칠 전 급성폐렴으로 입원하셨다가 호전되어 병실로 오셨습니다.” 수년 동안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스승님의 외부 출입을 극진히 보살펴온 제자의 전갈이었다. 목사님과 통화가 가능하다고 하여 간단히 문안드렸다. “목사님, 속히 회복하시어 다음 동락회에서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고 하였더니 “그래, 그럴게”하고 응답하셨다. 이것이 스승님과의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당장 달려가서 용안을 뵙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럽기만 하다.
내가 한승호 목사님과의 처음 만남은 1949년 3월 평양성화신학교에 입학한 때다. 평양제일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서 공산주의 세뇌교육과 일요일 근로봉사 동원에 질려 방황하던 나는 성화신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예과에 도피성 입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승호 선생님(목사 안수 받기 전)이 그 반의 담임이셨다. 선생님은 미남이실 뿐만 아니라 지성미가 넘쳐흐르고 젊은이들을 매혹케 하는 성품의 소유자이시기도 하였다.
영어시간으로 기억되는데 선생님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명식이와 계준이는 채플시간에 어디 갔었나?”하고 말씀하시기에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빵집에 다녀온 것을 어떻게 짐작하셨는지 마음에 찔리고 학우들 보기에 민망하였으나 선생님의 깊은 관심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공산 독재치하에서 학문, 신앙 및 행동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된 신천지였던 성화신학교는 1949년 크리스마스 음악회와 배덕영 교장의 행방불명에 이어 북한당국에 의해 폐교되었다.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950년 8월 초 어느 날, 한 선생님과 김용옥 선생님 그리고 또 한 분(안병욱 선생님?)이 보통강 건너 서장대란 곳에 있는 우리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셨다. 미 공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은 신학교 폐교 후 염색공장에 취업하셨는데, 염색한 직물을 우리 동리 뒷동산에서 건조작업을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하늘과 같은 스승님을 대하는 기쁨과 떨림 가운데 대접할 것이 없어 우물에서 갓 퍼올린 냉수에 미숫가루를 타서 대접한 기억이 희미하다.

1951년 가을, 한승호 선생님을 부산에서 다시 만난 것은 나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후퇴로 남하한 평양 지역의 신자들이 부산 경남여고 담장 뒤에 천막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다가 얼마 후 영주동 목조 건물로 이전하였다. 1953년 서울 수복 이후 교회는 서울 장사동 중앙신학교 강당을 얼마동안 이용하다가 신당동 마사회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이전하였다. 나는 감리교신학교 학생으로서 부산 초창기로부터 장사동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생활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교회 일은 무엇이나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다. 내가 이렇듯 교회생활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목사님의 말씀과 생활 그리고 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때문이었으리라. 그분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본질을 확신과 지성과 열정으로 포장한 다이나믹한 말씀으로써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믿음의 씨앗을 깊이 심어주었고 고학으로 고달픈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다.
장사동 시대는 아마도 시온교회 역사상 절정의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교인은 불과 200명 정도인데 반해 청년 및 대학생의 수는 50명을 상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대선 박사(전 연세대 총장), 김용옥 박사(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 안병욱 교수(숭실대학 명예교수), 홍종명 화백, 김학수 화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교회에 즐비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시온교회는 지성인 교회로 장안에 평판이 자자하였고 그 젊은이들 가운데서 사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듯 차원 높은 회중이 응집할 수 있었던 것은 30대 중반이셨던 한 목사님께서 이미 격조 높은 신앙과 지성과 인품의 소유자이었음을 암시한다. 스승님의 젊은 지성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 후 국제대학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재직 시에는 물론이고 은퇴 후에도 그분의 주변에 제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내가 한승호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삶의 역경을 몇 번이나 넘기신 다음이었다. 선생님은 평양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유복한 가정의 1남1녀 중 장남을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명문 상지대학 경제학부 재학 시 일제의 학병으로 징집되셨다. 그분은 만주 전선으로 파견되었는데 중공군과 치른 육탄전의 참상 속에서 구사일생하셨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은 대개 사회주의로 쏠리는 것이 시류였는데 그분이 거기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그 유혹에 대한 백절불굴의 내적 투쟁과 깊은 예지叡智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스승님은 사랑하는 여동생이 반공운동에 가담한 죄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후 생사를 모르는 아픔을 겪으시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학생들이 “신학교 졸업자가 아닌 교수의 강의를 받을 수 없다”는 항의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분은 이 항의를 달게 받아드리고 교수직을 사퇴한 다음, 바로 그 학생들과 함께 신학공부를 마친 후 다시 교수직을 맡으셨다. 이러한 용단은 오히려 그분의 인기와 존경을 상승시켰다.
스승님은 1956년 미국 보수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유학을 가셔, 당시 첨단 학문으로 알려진 종교심리학과 목회상담학을 전공하시면서 당대의 대가 폴 존슨 교수에게 사사하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학문들이 아직 소개되지 않은 생소한 분야였으나 현대 목회에 필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목사님의 명 강의로 인해 그 수요가 날로 폭증하였다. 따라서 한 목사님은 여러 대학에 출강은 물론이고 목회자들의 집회에 강사로 빈번히 초청되곤 하셨다. 우리 신학계와 교계에 새로운 학문을 전달하고 발전시킨 그분의 공헌은 실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한 목사님은 기독교방송국의 <같이 생각해 봅시다>라는 상담 프로그램을 장기간 인기리에 진행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청취자들의 안타가운 사연에 응답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분은 마치 질문자와 마주앉아 대화하는 것처럼 상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본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길을 찾도록 인도하셨다. 당시는 군사독재 치하에서 급변하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굉음과 혼란이 극치에 이르는 와중이어서 스승님의 방송 상담은 사람들이 직면한 갈등과 고통의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과 위로를 주었으며 삶의 희망과 용기를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한승호 목사님은 평안도 특유의 직선적이고 열정적이면서도 과묵하고 깊은 통찰의 소유자이셨다. 그분은 설교나 강의를 제외하고는 말을 많이 하시거나 대화를 주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고 호탕하게 웃으시거나 또는 “그러냐”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은 그분의 사려 깊은 성품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상담학을 전공하신 분의 특유한 경청법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스승님은 교회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우시거나 “수고한다”는 말씀밖에는 별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눈빛과 모습에는 깊은 인간적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배어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한 목사님과 가족의 사랑은 나에게 사랑의 원형을 가르쳐 주었다. 1950년대는 우리의 GNP가 $100도 채 되지 않는 시절이었고 더욱이 피난민 교회 목회자의 살림이 얼마나 열약하였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때 호주머니에 교통비 밖에 없는 고학생인 나는 주일예배 후 점심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때로는 교회의 회식으로, 때로는 할머니 권사님들의 도움으로 점심을 때우곤 하는 한편, 빈번히 목사님 주택의 식탁에 초대되곤 하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세 아들과 함께 당시로써는 진수성찬을 대했던 감동과 감사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저를 대하시는 가족들의 모습이 어떻게 그리 너그럽고 사랑스러웠는지 참으로 풍요를 구가하는 오늘에도 찾기 어려운 장면을 연상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재현한 초대교회 밥상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승님은 나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셨다. 내가 유학 중인 선생님에게 라틴어 문법책을 보내주시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영어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공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글과 함께 책을 보내주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철없이 부탁드린 것에 대해 평생 후회하며 충고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목사님은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에도 그의 관심은 여전하셨다. 하루는 서대문에 있는 중식당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 자리에는 모 대학의 교수이신 선배님도 임석하셨는데 분위기로 보아 만일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그 대학에 소개할 뜻이 계셨던 것 같았다.
내가 연세대학에 봉직하면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의 벽은 좀 낮아지고 자유로워졌다. 스승님과 나는 대학 채플의 운영자로써 교환 설교를 단행하기도 하고 내가 한국기독교대학 교목회 회장으로 기독학생회 캠프를 주관할 때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시면서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여가시간에 스승님을 비롯해서 계명대 이장식 박사님과 최성찬 박사님, 이화여대의 한준석 교수님 등 여러 대학에서 오신 교목님들과 함께 나눈 격이 없는 친교는 내 인생에 지워버릴 수 없는 향연으로 간직되어 있다.
아마도 선생님과 격이 없는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은 동락회同樂會가 시작된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부자의 관계와 같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지만 말이다. 1970년 말 경 나는 존경하는 스승님들과 선배님들을 묶어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마경일 목사, 박대선 박사, 한승호 목사, 유동식 박사, 한준석 교수 등은 서로 친숙한 사이면서도 모임이 없는 흩어진 보석과도 같았다. 모든 분들에게 의사를 타진한 결과 모임이 성사되었고 마경일 목사님께서 “동락회”라고 작명하시어 달마다 화기애애한 친교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불편하신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시면서도 빠짐없이 참석하셨고 원로들 및 박영배 목사, 김기복 목사, 필자 등 젊은 후학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곤 하셨다.

회고해 볼 때 필자는 60년 이상 한 스승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물론 사제지간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향유할 수 있었던 남다른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 짧아 스승님의 크신 은덕을 모두 표현할 길이 없어 못내 아쉬운 심정과 함께 말이다. 비록 스승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한 평생 그분에게서 받은 은덕을 기리며 아직도 비어있는 나의 그릇을 조금씩 채워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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