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3년 성서와 문화

구절초九節草

성서와 문화 2013.10.10 16:27 조회 수 : 2584

[최 종 태 ·조각가 / 예술원회원]

 


박용래의 시詩중에 구절초란 단어가 있었다. 박용래는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시골스러운 말들. 잊혀져가는 풀들의 이름을 찾아내서 향수 짙은 고향 같은 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숫한 단어 중에서도 나는 웬일인지 그 구절초란 단어가 영 잊혀 지지가 않았다.
한 세월이 흘렀다. 그가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서 기 십년이 흘렀을 때 금산에는 김행기가 군수로 있었다. 문화회관이라 했던가 집짓는 일로 그 고을에 간 일이 있었다. IMF라 하며 노는 인력이 있어서 산에 소나무 가지치기를 하였다. 햇빛이 땅으로 내려 쏟고 나무사이로 바람도 시원스러웠다. 나무 밑에는 각종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 하아얀 국화 같은 꽃들이 있었다. 약초라 해서 몰래 캐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성가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물으니 구절초라 하였다. 그냥 하는 말로 들국화였다. 아 어쩌면 박용래와 꼭 닮아 있었다. 덧붙은 것도 없고 청초하고 꽃 얼굴에는 가득히 무슨 말인가를 터질듯이 담고 있었다.
또 한세월이 흘렀다. 저 보은 시골 어떤 산 밑에 내 아우가 살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기고가 되는 날에는 꼭 서울에 올라온다. 한번은 무슨 때문인지 구절초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고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한번은 꽃씨 한 말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왔다. 구절초 씨라 하였다.
씨를 마당에 뿌리지 않고 모판을 만들어서 싹이 나오면 옮겨 심을 요량이었다. 이윽고 예쁜 잎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뒷마당을 비집고 여기저기 심었다.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을 보내면서 물주고 다칠세라 정성을 다 하였다. 이윽고 가을이 왔다.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집 뒷마당에는 늦은 가을 구절초가 핀다. 지금은 5월. 진달래꽃은 벌써 지고 엊그제는 모란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졌다. 모과나무도 꽃을 지웠다. 작약이 마당 한 구석에서 꽃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지금 우리 집 구절초는 땅바닥에 새파라니 쑥처럼 모양하고 있다. 나는 매일 같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여다본다. 그 옛날 첫 손주 보듯이.
우리 집 구절초는 꽃이 하얗다. 파아란 가을에 하얗게 핀다. 왜 그 이름에다 풀 초草자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꽃 화花 자를 주지 않고. 풀이 꽃보다 더 높다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성서에 보면 예수가 세 제자만을 데리고 다볼산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별안간 예수가 하얗게 변모했다. 몸도 옷도 온통 하얀 빛으로 변했다. 모세가 나타났고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라파엘이 그린 「예수의 변모」라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눈 여겨 볼 일은 그림 아래쪽에 성서에는 없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눈먼 소년 하나가 일어서서 저 예수님을 보라고 손짓하고 있다. 눈 뜬 사람들은 못 보는데 눈먼 소년이 보고 있다는 그림이다. 그 놀라운 하아얀 초자연의 경치를 ....
1970년대 말쯤인지 싶다. 대학생들은 매일 같이 데모를 한다하고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루는 문득 한 스승이 생각나서 삼선교 언덕 집을 찾아갔다. 조각가 김종영이었다. 특별히 할 이야기도 없는 터라서 무심코 어제 신문에서 본 함석헌 이야기를 하였다. 구설수가 신문에 오른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김종영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하얀 옷 입은 사람은 흙탕물이 한 방울만 튕겨도 금방 눈에 뜨인다. 함석헌 선생은 언제나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옛날 우리 풍속에 상중喪中에는 여인들이 흰 무명옷을 입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럴 때면 어머니도 작은 어머니도 모두가 하얀 무명옷을 입었다.
세월이란 것은 참으로 화살같이 지나가는 것이다. 내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이다. 영원은 시간이 없는 공간이라는 데 시간이란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까맣던 머리가 저절로 하얗게 된 것이다. 꽃은 피었다가 이내 지고 옛말에 인생은 칠십이 드물다 하였다. 연못가에 봄풀이 깜박 꿈을 꾸는 사이 뜰 앞에 오동나무는 가을 노래를 부른다. 우리 집 구절초는 왜 꽃을 하얗게만 피울까. 하얗다 못해 가을 하늘 그 먼 빛으로 푸르다. 다볼산의 예수가 저런 하얀 빛이었을 것 같다. 햇빛보다 더 밝으면서 눈이 부시지 않는 빛.
이상한 일이다.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얗게 보인다. 나만 그럴까. 공자도 석가도 예수도 모두 하얗게 보인다. 오염 권에서 해방된 것. 깨끗한 것. 내가 좋아했던 스승들 모두가 흰색으로 보인다. 스님 법정도 김수환 추기경도 하얗게 보인다. 다들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내 마음 안에는 언제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함께 언제나 있다. 세월은 흘러가도 있는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천국에는 시간이 없고 어둠도 없고 항상 밝으면서 눈부시지 않고 그냥 하얗게 빛나고 있을 것 같다. 영원히 그렇게.
오래전의 일이다. 몇이서 네팔에 간 일이 있었다. 하루는 뽀까라에 간다고 했다. 아침에 떠나서 저녁나절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에 두 세집 민가 마을이 있었다. 차에 기름도 넣고 차도 마시고 경치도 쉴 만 하였다. 그 곳 살림집은 대개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아래에는 돼지를 비롯해서 짐승들의 방이고 사람은 위층에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개와 닭들이 놀고 있었다. 어떤 한 집은 우리처럼 담이 있었다. 담에는 마침 커다란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우리 차가 멎는 걸 보고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아차 내가 많이 오염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눈이나 새의 눈이나 개의 눈이나 같은 것을 느꼈다. 순수의 눈빛이었다. 내가 죄인이다 하는 각성이랄지 그런 것이 반사적으로 오는 것이었다. 새도 또 마당에 짐승들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도 땅도 나무도 정겹게 보였다. 오염되지 않는 청결함에서 일체 하는 것 같았다. 뽀까라에서 바라보는 안나푸르나의 하얀 자태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고향 대전에서 잡지책이 날라 왔다. 임강빈의 「그냥」이란 시가 있었다. 읽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았다. 친구한테 전화를 한다. 자네 어떻게 지내나. 그 친구 말이 「뭐, 그냥.... 」 그런다.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한다. 어떻게 지내나 그러면 내가 「그냥 저냥 있어요...」더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그 말속에 다 있는 것이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이게 다 시간이 만든 작품이다.
깨끗한 것이 좋다. 깨끗한 사람이 좋다. 박용래가 그렇고 스님 법정이 그렇다. 내 주변에는 깨끗하고 맑은 사람들이 많았다. 왜 그런지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것은 세월과 함께 가는데 어떤 것은 그 자리에 언제나 있다.
깨끗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좋은 그림은 타고 나야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깨끗한 그림은 노력하면 될 일이 아닐까. 늦은 가을 외딴 산자락에 하얗게 핀 구절초. 누가 보거나 말거나 시간이 가거나 말거나 아랑곳함이 없이 그냥 피어 있다. 이 세상일도 다 모르는데 저 세상일을 내 어찌 알겠는가. 저 꽃 한 송이의 사연도 모르면서 다볼산의 하얀 예수 이야기를 내 어찌 알겠는가.
그림 그리는 일은 어제 묻은 때를 지우는 일이다. 때를 다 지울 수만 있다면 좋은 날 밝은 날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8 영원한 화和의 미소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358
37 실 종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297
36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인생을 생각하다 (Ⅰ)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369
35 노년일지老年日誌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278
34 <음악 片紙 ⅣⅩⅦ>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 베르디 ‘나부코Nabucco’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474
33 고흐를 다시 생각하다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570
32 공존이라는 자유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343
31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낙수落穗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459
30 多夕 유영모 선생의 자속적구원自贖的救援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520
29 우주와 그리스도인 file 성서와 문화 2013.12.18 2331
28 십자가와 태극기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428
27 삼존석불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603
26 하 얀 사 발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654
25 스승의 은덕을 기리며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773
24 계산하지 않는 계산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666
23 <음악 片紙 ⅣⅩⅥ> 물 위를 걷다 - 리스트 ‘두 개의 전설’ -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614
22 주님은 나의 목자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569
» 구절초九節草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584
20 우리의 국적 file 성서와 문화 2013.10.10 2613
19 오늘의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다 -한 평신도의 소리- file 성서와 문화 2013.07.03 2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