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2년 성서와 문화

[허 영 환 ·미술사]

 

 

대개 저 가을의 모습은
그 색깔은 참담하여
안개 흩어지고 구름 걷히고
그 모양은 청명하여
하늘은 높고 햇빛은 찬란하고
그 기운은 살을 에듯 차가워서
사람의 살과 뼈를 찌르고
그 뜻은 몹시 쓸쓸하여
산천이 적적하고 고요하다.

 

중국 북송시대의 문인이며 당송팔대가 가운데 하나인 구양수(1007~1072)가 지은 추성부(秋聲賦)의 한 구절이다. 문인, 사학자, 고고학자, 정치가였던 구양수도 세상을 떠날 무렵 울부짖듯 세차게 부는 쓸쓸한 늦가을 바람소리를 듣고서 이런 명문을 남겼다.
그런데 이 추성부를 읽고서 조선중기인 1805년 늦가을 환갑을 넘긴 단원 김홍도(1745~1806)는 병환이 내내 위독하여 생사 간을 드나들면서도 절필작絶筆作인 추성부도(종이에 수묵담채, 56 X 214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를 그렸다.
병든 몸을 추스르기 힘들면서도 대작을 정성을 다하여 그리고 왼쪽 여백에는 추성부를 다 쓰고 끝에는 乙丑冬至 丹邱(을축동지 단구, 1805년 12월, 단구는 김홍도의 별호)라고 쓰고 도장을 찍었다. 60년 한 생애의 마지막 그림이고 글씨이며 낙관이었다. 그림을 잘 그려 왕실 규장각의 최고화가여서 자비대령화원자리까지 올랐던 화선畵仙 김홍도는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했을까?

나는 가을만 되면 구양수의 추성부가 생각나고,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꼭 10년 전 늦가을에 멀리멀리 혼자 떠난 친구 박이엽(朴以燁, 1936~2002)이 그리워진다.
1968년 연말 선린회 송년모임에서 박이엽과 얘기를 나누면서 나와 비슷한 환경과 지적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남다른 매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일보 문화부기자였던 나는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에 속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그는 말문이 열리면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 가기도 했다.
방송작가 박이엽은 1936년 1월 부산에서 태어나 66년간 살다가 2002년 11월 서울에서 풍진세상의 외로운 소풍을 끝내고 귀천했다. 그러니까 올 가을이 10주기10周忌가 된다.
박이엽이 살아있을 때는 동갑내기(병자생 쥐띠)친구인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담배를 몹시 피웠고 생활리듬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제도권 안에 살면서 칼날 같은 생활을 하던 내가 볼 때 그의 삶은 힘들면서도 불규칙한 것이어서 보기에 안타까웠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나 되었구나 하게 된 것은 문학평론가 김윤식교수(1936년생)의 글과 한양대학교에서 발간하는 <사랑한대>(제206호, 2012. 9)때문이었다. 김윤식교수는 그의 컬럼<김윤식의 문학산책>(한겨레 2012. 9. 17)에서 박이엽이 번역 출판한 책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비선서 143)를 언급했고, <사랑한대>는 한양인 권장도서 73선의 예술분야에서 박이엽 번역의 <나의 서양미술순례>(서경식 지음. 창작과 비평사)를 선정했다.
그러니까 당대의 문학평론가가 거론하고 좋은 대학의 권장도서로 뽑힐 만큼 박이엽의 번역수준(영어와 일어)이 높았다는 얘기다.
나는 이 두 가지 기사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고 박이엽이 우리들 곁을 떠난지 벌써 10년이 되었구나 했다. 그리고 곧 그의 미망인 정인임 교수에게 근황을 묻고 위로했다. 두 아들 영훈(1967년생), 세훈(1969년생)이도 잘 있느냐고 물었다. 죽은 자는 이미 진토가 되었지만 산자들은 아직도 남편과 아비를 그리워하면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본명이 박은국(朴殷國, 풀이하면 순박하고 꾸밈없는 소리나라)인 그는 방송작가가 되면서부터(1961년) 필명을 박이엽(朴以燁, 풀이하면 빛남으로써 순박하다)이라 하고 스스로 행세했다. 본명이나 필명의 풀이는 내가 한 것이지 그에게 물어본 바는 없다. 키는 중키(166센티 정도)에 몸무게는 가벼운(52킬로 정도) 그의 깡마른 모습을 보면 센바람에 날아갈 듯하여 딱했지만 그는 언제나 기름 한 번 바르지 않은 머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걸어 다녔다. 참으로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그가 뛰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는 늘 가볍게 웃으면서 (그의 눈은 참 맑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다. 말이 없었다. 우리들 선린회 모임에 참석하고서도 몇 시간이고 말 한 마디 안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멋쟁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시절에도 버버리코트를 입고 헌팅 캡을 쓰고 다녔다. 물론 장미뿌리로 만든 비싼 파이프를 물고 빙긋이 웃으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박이엽이 일찍 죽은 것은 담배(끊임없이 파이프를 빨았다)와 200자 원고지 메우기(거의 매일 30장 정도의 원고를 썼다)라고 생각한다. 시작하면 하루도 쉴 수 없고 늦출 수도 없는 방송극 원고를 쓴다는 것은 정말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치하에서 시작하여 6년간이나 계속한 기독교방송의 연속드라마 <여명200년 (2000회)>은 하루도 쉰 적이 없는 장기전이었다. <여명200년>은 1986년에 24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때 부터 그의 선병질적인 체질은 더욱 나빠졌고 드디어는 만성폐쇄성질환으로 숨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66년 한 생애는 힘든 투쟁사였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것, 집안에 사상적으로 조금 삐딱한 사람이 있었던 것, 인문계가 아니라 공업고등학교를 어렵게 다닌 것, 문학과 음악에 전문가 수준의 교양을 갖춘 것, 대학의 영문과를 다니면서도 영어와 일본어를 독학하다시피 했던 것, 수 없이 직업을 바꿨던 것(방송국 피디, 신문기자, 음악잡지 편집자, 번역작가와 방송드라마작가, 방송국 홈드라마 단골작가, 경동교회 50년사 집필자, 부산에서 4.19전에 조봉암의 진보당벽보를 붙이고 다니다 경찰에 쫓긴 일 등)등이 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면서 그를 말 없는 사나이로 만들었다.
그는 22살 때(1958년) 롱펠로우의 서사시 에반젤린을 번역, 출간하면서 영문번역 실력을 기르기도 했다. 이후 콜리지의 늙은 수부의 노래. 콜드웰의 바보, 싱거의 장터의 스피노자 등도 계속 번역했다. 그래서 창작과 비평사의 발행인이며 편집인인 백낙청교수 (1938년생. 서울대 영문과)의 칭찬 (박이엽씨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을 잘 하는 작가라는)도 듣고 책(<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등)을 창비에서 내기도 했다.
박이엽이 세상을 떠난 4년 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을 추모하면서 <그리운 얼굴들>이라는 306쪽짜리 책을 냈다. 그 날 선린회 회원을 비롯한 30여명의 친구들이 모여 그를 생각하며 식사를 함께했다. 그런데 박이엽의 아내 정인임 교수는 우리들 앞에서 먼저 간 남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박이엽씨는 남편감으로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못 됐습니다. 돈 생기면 술 마시고 집안은 몰라라 했으니까요. 그러나 존경할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두가 유목민(노매드)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