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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성서와 문화 2012.12.19 12:49 조회 수 : 925

[임 인 진 ·시인]

 

극성을 부리던 더위가 한 풀 꺾인 듯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던 날이었다. 영등포쪽 한강둔치 옆길을 지나다가 희끗희끗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다름 아닌 메밀꽃이었다.
강바람에 여린 줄기가 얼기설기 서로 얽힌 주접스런 모습으로 겨우 눈을 뜨듯이 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곳에서 곤경에 빠진 내 피붙이를 만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고향의 철부지 처자들이 얼빠진 모습으로 서울 도심 강가에 나타났다고나 할까?
그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어이없는 짓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화가 치밀었다. 산책로 주변을 한가히 거닐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조차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영문 모르는 산골 처녀
한강둔치에 끌려나와
내키지 않는 선을 뵌다.

위로 하늘을 찌를 듯
아래로는 벌집 쑤셔놓고
천년만년 꿈꾸는 소용돌이
마음 들뜬 사람 모두 모여
풍선처럼 붕 떴다가
바람 빠져 사라진 강기슭

호란胡亂에 끌려가고
왜란倭亂에 짓밟힌
환향녀還鄕女 설움 삭이던 곳

은장도銀粧刀 품은 넋이
원한怨恨 되어
뽀얀 서리로 내리는데

멋모르고 따라나선
심산유곡深山幽谷 철부지 처자들
풋내 나는 눈웃음 상긋거린다.
       - 시 「메밀꽃 2」 -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강원도 봉평의 메밀꽃은 널리 알려졌다. 메밀꽃이 관광자원으로 알려짐에 다라 그 열매 또한 토속음식의 재료로 각광받아 지역주민들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달밤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숨 막힐 것 같다’는 작품 속 표현처럼 봉평의 메밀꽃은 그곳 산촌의 고즈넉한 배경과 함께 그에 따르는 정취情趣로 말미암아 그 영상映像이 아름답게 도드라져 보인다.
메밀꽃은 완상용 꽃이 아니다. 산이나 들에 흔히 피는 야생화도 아니다. 꽃이 지고 열매가 영글면 껍질을 벗겨 가루로 빻아 국수, 묵, 부침개, 만두를 만들어 먹는 곡식의 한 종류다.
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 산골짜기 남아도는 아무 밭이나 갈아엎어 씨를 뿌려두면 싹이 나와 줄기 끝에 여러 개의 작은 꽃이 핀다. 처음에는 푸르스름한 연녹색 꽃빛이 날이 갈수록 하얗게 변하면서 메밀밭 전체가 한 모습으로 어우러진다. 그런 꽃밭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거기에 알맞게 조화를 이룬 산촌의 풍경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소설 속에서 그린 메밀꽃은 달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촉촉이 이슬 머금은 달밤의 메밀꽃밭은 상상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런 배경을 설정해놓고 시골장터를 떠도는 장돌뱅이의 삶을 부각시킨 이효석선생의 심미안적 감각은 놀랍도록 예리하다.
닷 세마다 열리는 시골 장터를 맴도는 장돌뱅이들의 떠돌이 삶이란 그저 그렇고 그럴 것이고, 메밀꽃도 마찬가지로 별로 눈 여겨 보아지지 않는 꽃이다. 그럼에도 그 달밤의 장면은 한껏 신비한 상상력과 눈부신 영상미를 안겨준다.
이제 메밀꽃은 꽃보다는 곡식으로, 곡식보다 꽃으로, 어느 것이 먼저인지 그 순위를 알 수 없이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눈에 띄게 예쁠 것도 없고 유별나거나 모나지도 않게 그냥 수더분한 누이 같은 꽃이다.
하얗고 매끈한 종아리 드러내고 곰취, 곤드레 뜯으러 산기슭 오르내리던 이종사촌, 고종사촌 누이들 같은 메밀꽃.
그 누이들 한데 모여앉아 삼 삼던 모습, 찰깍찰깍 삼베 짜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산비탈
묵밭을 일궈
메밀을 풀어놓고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
그냥 저냥 놔뒀더니

산기슭 먼빛이
희끄무레 솟아올라
헛것이 보였는가 치달아보니

얼굴 오종종한 누이들
고운 종아리 드러내고
빛 바라기 하네.

골방에 틀어박혀
찰깍찰깍 삼베 짜던
사촌누이들 다 모였네.
       - 시 「메밀꽃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