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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탐방 (Ⅱ)

성서와 문화 2012.12.19 12:47 조회 수 : 911

[김 경 재 ·신학]

 

 

지난 가을호에는 「현대신학 탐방(1)」이라는 제목아래 지구촌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두 가지 흐름을 소개하였다. 이번 겨울호에서는 셋째마당으로서 유기체적 과정신학, 넷째마당으로서 생태학적 몸의 신학, 그리고 다섯째마당으로서 미학적 예술신학의 발생배경과 핵심주장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셋째마당: 유기체적 과정신학 운동 /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한다는 것이요, 그것은 현실적 존재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세계의 창조적 전진 속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현대신학의 흐름 중 세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운동은 신학계에서는 ‘과정신학過程神學’이라고 불리는 신학운동인데 정통신학과 신앙인을 향하여 참신한 도전과 생명력을 부어주는 지성적 신학운동이다. 이 사상운동의 근원은 영국의 수학자요 과학자로서 활동하다가 미국 하버드대학 철학교수로서 활동하면서 생의 후반기를 마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1861-1947 이다.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세계지성사에서 탁월한 창조적 공헌자로 평가받으며 특히 과학철학, 미학, 교육학, 종교학, 신학 등에 창발적 사고를 하도록 생수를 공급하고 자극하고 도전하였다.
화이트헤드 자신은 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고대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근대의 임마누엘 칸트가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지만, 그들의 사상이 동시대와 후대의 기독교신학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화이트헤드가 그러하다. 자기철학의 이름을 ‘유기체의 철학 Philosophy of Organism’이라고 붙인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은, 챨스 하트숀과 존 캅 같은 학자들에 의해 기독교계에 깊고 넓게 소개되었고, 20세기 후반기 거의 모든 다양한 기독교 신학운동에 창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과정신학의 발생배경과 그 사상의 특징과 우리가 경청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
첫째, 과정신학은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으로 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이 상호간에 관계되면서 생성becoming하는 일련의 사건event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상이든 화분 속의 꽃한송이든, 지구항성이든, 심지어 한 마리의 박테리아 세균이든 실재하는 것들은 반드시 사건의 장場 속에서 일정한 맥락을 가지고 다른 사물 혹은 사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출현하는 창발적 결과들이라는 것이다. 홀로 독불장군처럼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이나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사건적 계기와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나 피동적으로 관련되어있다.
둘째, 존재하는 모든 실재가 생성적 과정임을 강조하는 유기체철학은 데카르트 이래로 근현대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해온 모든 실체론적 이원론을 부정한다. 전통적 생각습관은 무기물과 유기물, 물질과 생명, 자연과 문화, 시간과 공간 등 대립되거나 대조되는 두 가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일상적 삶은 영위되고 있다. 물론 분명히 정신적 실재가 있고, 물질적 실재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실재actual entity’라고 명명한 ‘경험의 원초적 기본단위’가 어떤 형태로 결합하고 관계되는가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물론과 유심론은 실제세계를 추상화한 단순세계관이라고 본다.
존재하는 세계현실은 무의미한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서 새로움을 창조한다.” 신은 이 새로움의 창조과정을 촉매하고 유인하는 신비한 분이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 속에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신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말이 진실이듯이, 세계가 신을 구원한다는 역설적 진리도 참이다. 신이 세계 속에 화육한다는 신앙이 진실일수록 더욱 그렇다. 과정신학은 신과 세계, 종교와 과학을 동시에 중요시 하고 양자를 통전시킨다.

 

넷째마당: 생태학적 몸의 신학 / 내가 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곧 나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만유를 통하여, 만유 안에 계시되 특히 사람의 몸을 임재장소로 삼으신다.
20세기 후반부터 인류에게 갑자기 자각되기 시작한 자연파괴,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 그리고 구체적인 기후붕괴로 인한 재난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생태학적 몸의 신학을 촉진시켰다. 오늘날 다양한 학문분야의 세계최고 지성인들은 우주조건, 지구행성, 지구생태화경, 인간의 몸, 인류의 문화 및 종교는 상호 깊게 내적으로 연관되고 상호 내적으로 삼투순환透循環 하는 ‘거대한 창발적 드라마’ 라는 데 견해를 같이 한다.
거의 2000년 동안 인간중심의 세계관, 종교개혁이후 거의 500년 동안 ‘오직 성성, 오직 믿음, 오직 기독교’만의 신학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시대post-protestant Era’에로 우리는 이미 진입해 들어갔다. 몸을 육체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우리들의 짧은 생각이 문제이지만, 모든 종교수행에서 몸은 구원 혹은 해탈을 위해서 극복되지 않으면 않되는 장애물처럼 여겨왔는데, 그런 생각이 잘못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몸은 물질적 분자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정교한 기계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말하면 45억년동안 지구의 시공과정에서 형성된 ‘복잡계의 창발과정’이며,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그곳에 들어와 임재하고 싶은 ‘성전’인 것이다.
‘생태학적 몸의 신학’이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인간의 몸은 지구의 생태학적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의 오염과 파괴는 곧바로 인간 몸의 오염과 파괴에로 직결되고, 문화나 종교의 존재방식에도 결정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생태학적 몸의 신학’은, 단순히 전통적인 생각 곧 만물과 인간생명의 ‘일심동체’를 반복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생태계를 ‘하나의 유기체적 몸’이라고 은유할 때, 인간이라는 생명종은 전체 몸의 메카니즘을 유일하게 파악하고 조절하는 ‘두뇌’(머리)부분에 해당한다는 인류의 자리매김 의식이다(장회익의 『온 생명론』 참조).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자연생태계 안에서 인간책임성의 자각이다. 몸을 본능욕망에 맡겨 버리는 본능주의도 않되고, 몸의 욕망을 억압하고 제거하려는 금욕적 종교도 않된다. 몸을 창조주의 걸작중의 걸작으로 자각하고, 몸으로 하나님을 모시면서 자연 안에서 중추신경적 기능담당이 중요하다.

 

다섯째마당: 미학적 영성신학 / 현대인의 종교는 지성과 감성과 윤리성을 넘어 영성에 갈급하며, 영성체험과 영성함양의 매체가 미학적 예술이기를 갈망한다.
최근 세례받고 개신교 신자 되었음을 여러 글로서 고백한 한국의 비판적 지성인중 한 분이었던 이어령 교수의 신앙고백적 책이 『지성에서 영성으로』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1세기 종교는 지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지성에 정직하고 성실하되 지성을 넘고 돌파하여 인간의 영성적 생명차원에 겸허하고 개방적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상징의 부활이다.
현재 생존하시는 한국의 원로 신학자이신 유동식교수의 어쩌면 마지막 신학저작물의 제목이 『풍류도와 예술신학』이라는 것에 독자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동식교수는 “예술 없는 종교는 도덕을 위한 종교로 변하든가, 영적 구원을 상업화하는 종교로 변해갔다”고 진단했다. 20세기 가톨릭교회를 갱신시키는 일에 큰 공헌을 한 칼 라너 교수가 “미래엔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라는 예언적 충고도 명심해 둘 일이다. 신앙이란 삶의 현실 속에 모순과 추함과 고통이 있음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창조적 새로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동참 하면서, 우리의 삶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용기와 지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