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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빗길 운전

성서와 문화 2012.09.18 14:11 조회 수 : 878

[김 용 수 ·조각가]

 

 

어느 때, 시골 오두막으로 작업실을 옮겨야 하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초막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을 만들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산골이어서 차가 필요 했습니다. 장롱 속 면허증이 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매 신청 이튼 날, 친절한 영업사원이 발 빠르게 차를 턱! 놓고 갑니다. 좁은 작업실 마당인지라 소형차도 벅찹니다. 그날따라 부슬비는 내리고 - 퇴색하는 집과 대비되어, 비 젖는 은빛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합니다.
차도에 팽개쳐진 생명들이 어른거리고 만감이 교차하더니, 그날 밤부터 매일 역사하는 악몽을 꾸는 것입니다. 그도 한 달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취소할까 했으나, 도구 하나 사려해도 도심과는 반나절 거리입니다. 그러다 ‘한 생명도 다치게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작업실 가는 오르막 산비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돌진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순간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조마 조마하는 마음으로 확인 해보니, 용하게도 그 놈이 빠져나갔는지 흔적이 없습니다. 그 때 그 고양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밤길 개울가를 지나는 데, 무언가 차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십여 미터 더 가서 차 밑을 살폈는데. 동행하던 분이 무엇을 잡아끄는 순간, 놀란 노루 한 마리가 펄쩍 튀어! 달빛 산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개울에서 물 먹고, 돌아 나오다 바퀴 사이 차축에 끼였던 것입니다. 다행이 외피가 두꺼웠던 까닭으로 차에 끌리고도 살았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세월인데, 엊그제 같이 기억이 새롭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동물의 사체를 만나는 날은, 어김없이 그 고양이와 노루가 뇌리를 스치고,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버릴 물이 뜨거우면 식혀서 버렸습니다. 외출할 때는 일부러 짚신을  성글게 삼아 신었다고도 합니다. 미물까지 염두 둔 생명에 대한 배려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정서에 살아 있었던 풍경입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 타는 논에 생명의 물입니다. - 작업실 오가는 농로 길을 운전 할 때, 생명에 대한 옛 분들의 그 사유는, 나에게 되 물려 눈물겹게 상승합니다. 그날은 온갖 생명들이 하루만 살 것처럼 약동합니다. 신경 쓸 일은 많아지고, 운전은 더딥니다. 날이 어둡거나 흐린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배불뚝이 맹꽁이, 두꺼비를 만나는 날도 있습니다. 녀석들은 모양만큼 행동 또한 느리니, 한참 기다려야 합니다. 외길! 공교롭게 자동차 바퀴가 지나가야할 자리에 꼼짝 않고 있으면 경적을 울려서, 어서 피하도록 독려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중 펄쩍펄쩍 뛰는 개구리는 확연이 구분되지만, 가냘픈 청개구리는 세심하지 않으면 놓칩니다. 나머지는 눈에 잘 띄지 않으니 난감한 일입니다.
아지랑이 피는 봄날, 차도 위를 낮게 나는 나비를 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름밤 속을 지나 온 다음날 - 차체에 달라붙은 하루살이 사체를 씻을 때도 그렇고,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 무리를 헤치고 가야하는 길도 편치 않습니다. 그저 속도를 줄여 피해를 최소화 해야겠다는 생각 뿐, 다르게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볼까 했으나 집까지 거리가 멀어서 그도 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알게 모르게 살생을 하게 됩니다. 그간 내 행업으로 수 없이 사라져간 생명에게 언제나 미안합니다. 그러다 방안으로 들어온 파리, 모기를 놓고는 또 씨름하기 일쑤입니다. 수행이 아직 부족한 까닭입니다.

“어느 시골 동네에서 한 무리 장년들이 개를 잡아, 그슬리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불기운에 설죽었던 개는 깨어나, 사력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위협을 느낀 생명의 움직임은 비호같아서, 사람들은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땅거미 질 무렵, 큰일을 치렀던 그 멍멍이는 털 없는 숯 검댕이 그대로 주인집에 다시 들었습니다. 주인을 보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같이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핥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던 주인입니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은 가슴을 쳤습니다.”
노자는 “원한은 덕으로 갚아라! (報怨以德)” 했습니다. 덕德은 도道의 열매니, 모두 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온 생명의 고향에는 미워할 실체가 본래 없는 까닭입니다. 큰 스승들의 한 결 같은 메시지는 오늘도 메아리치고 있으나, 세상사 싸움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다툼의 근저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욕망은 빈 그림자! 허깨비와 씨름하는 꼴입니다. 아,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또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살상을 합니까? 편견, 시기, 질투, 증오 등등으로 밤새는 인간사입니다. 한 생각 돌리면 평화가 깃들고 생명을 보듬을 수 있건만, 그 것이 천리같이 멀어서 전쟁과 살육입니다. 작은 생각 하나를 잘 갈무리하면 하늘이 되고, 한 생각 어긋나는 데서 다툼이 됩니다. 찰나의 한 생각 챙길 수 있으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것입니다.

생각이란 실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오롯한 이성 판단의 결과 일 것 같아도, 자의식과 무의식이 크게 작용합니다. 인류 누 만년 습성의 집적이, 우리 유전자DNA에 오롯이 저장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수행은 이것을 맑게 하려는 과정입니다. 욕망의 불길은 거세고, 오욕 낙을 극복한 순수의식으로 사고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투명한 지성의 소리는 멀리 있고, 사욕의 손길은 가깝습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은 새길게 많습니다. 마음(心)을 칼날(刃)로 다스리고 있는 형국이 ‘忍’ 자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욕망은 조리調理하지 않으면, 날선 칼도 듯 지 않는 것입니다.
동양 유가儒家에서도 마음을 살피고 있습니다. 심성心性을 말할 때 심心은 불에, 성性은 물에 배속합니다.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성향을 불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고(火動), 물은 고요히 가라앉는 속성이 있습니다(水靜). 불은 물로 끄듯이, 요동치는 마음은 고요함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지보다 뿌리를 살펴서, 튼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쓰는 말 ‘진정해!’는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침묵을 금으로 삼고, 좌정하는 이유입니다. 불가의 견성見性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지구별에 생명이 오기까지 그야말로 눈물의 역사입니다. 45억년 됐다는 지구에 산소가 발생한 것은 25억 년 전입니다. 7억년 전만해도 - 지구는 두께 1Km 되는 빙하가 뒤덮고 있었습니다. 6억3천 년경, 전 지구에 대규모 화산이 폭발합니다. 이 때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증가는 지구 온도를 높여 빙하가 녹기 시작합니다. 따뜻한 지구, 풍부한 산소로 바다에 다세포 생명체가 출현하는 환경이 됩니다.
이로부터 현생 인류 출현은 사, 오만 년 전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시대는 만년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대 동이족(홍산 문명), 수메르 족(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나일문명)등이 6~7천년입니다. 45억년의 0.0000013%세월입니다. 우주 150억년 역사로 보면 흔적도 없는 세월입니다. 그야말로 찰라 인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바로 이렇게 해서 왔습니다. 그것도 이 순간 여기서, 칠십 억중 한 사람과 눈빛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인간이야말로 생명현상의 집적이요 기적의 집적입니다. 아니, 기적이라는 말조차, 구차합니다. 이 신비를 앞에 두고 우리가 어떻게 미워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현대과학은 50억년 후, 태양계도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운명은 더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웃 생명을 보듬을 수 있는 도량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우주의 꽃입니다. 꽃은 꽃으로 오롯이 온 생을 구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꽃을 꺾으면 우주를 꺾는 것입니다. 편견, 미움, 질투 등등은 생명을 꺾는 자료입니다. 무소유는 바로 이것을 말해야합니다. 맑은 마음은 높거나 낮거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실천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못한다 하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은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들의 가슴, 가슴에 맑은 샘 하나씩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이 돋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