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2년 성서와 문화

[김 순 배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는 미국 작가 토마스 울프의 소설 제목이지만 향수로 멍든 가슴을 지닌 채 살았던 쇼팽에게 부여된 형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스무 살 무렵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한 채 떠나온 모국 폴란드는 언제나 회한과 그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쇼팽의 내면에는 갖가지 이율배반들이 무성하게 서식하고 있던 터였지요. 남성성 속에 내밀하게 깃들여있던 여성성과, 그것과 상충하는 모성애에의 갈망, 사교계의 매력남으로 군림하면서 동시에 품고 있었던 자기 폐쇄적 성향, 거기에 더해진 조국 폴란드를 향한 해결되지 못한 향수들은 쇼팽의 삶과 음악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습니다. 
폴란드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 쇼팽이 그리워한 것은 ‘미지의 세계’ ‘파리’였지만 정작 반생을 파리에서 보내게 된 그에게 지난날의 폴란드는 역으로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지금 속해 있지 않은 곳’에 대한 갈망을 일생 품고 살았던 이가 쇼팽입니다. 고향에서는 미지의 도시를, 낯선 도시에서는 고향을 꿈꾸거나 그리워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지요.
이는 쇼팽의 음악을 구제받기 힘든 낭만성으로 물들이면서 ‘동경’과 ‘향수’라는 작곡가의 심층심리와 작품세계를 규정짓는 주요 키워드를 만들어냅니다.

사실 쇼팽이 평생 끊임없이 만진 장르는 폴란드의 춤곡인 마주르카Mazurka입니다. 어린 시절 접한 농민들의 소박하면서도 격렬한 춤과 노래는 그의 기억에 깊이 각인됩니다. 단일 장르로는 상당한 분량인 50여곡에 이르는 마주르카는 향수라는 난치병을 달래는 치료제였습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3박자 리듬에 다채로운 빛깔을 입혀 수십 개의 작품으로 남긴 것은 쇼팽의 뼈아픈 모국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마주르카 못지않게 쇼팽이 애착을 느낀 장르가 폴로네즈입니다. 마주르카보다는 좀 더 귀족적이고 공식적인 문화에 맥을 대고 있던 폴로네즈는 규칙적이고 직선적인 리듬 패턴으로 특징 지워지지요. 고향 떠난 쇼팽에게 이 리듬은 고국의 맥박처럼 언제나 옆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직접 총대를 메고 조국의 전쟁에 뛰어들지 못한 대신 쇼팽이 애국하는 길은 이 폴로네즈와 마주르카에 혼신의 열정을 기울이는 일이었습니다.

1846년, 그러니까  쇼팽이 죽기 불과 3년 전 이 폴로네즈와 낭만의 영원한 동의어 ‘판타지’가 만납니다. 음악적으로는 이율배반에 가깝다고 할 만한데 매우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패턴을 갖는 춤곡과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판타지가 한데 어울렸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폴로네즈 판타지 op.61’은 각기 다른 빛깔의 실들이 교차해서 짜인 직물처럼 매우 새로운 음악적 문양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인 발라드나 녹턴에서보다도 훨씬 복합적이고 미묘하되 보다 강렬한 감정의 굴곡들이 그 안에는 들어있는 것이지요. 
‘폴로네즈 판타지’의 전개과정은 하나의 화학반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듣는 이의 귀를 오리무중으로 내모는 예측 불가의 화성적 변화가 이 반응의 내용입니다. 슈베르트가 멜로디스트였다면 쇼팽은 하모니스트harmonist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화성의 판타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성의 화학 변화 속에 작곡가의 심경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스며들어있다는 점이지요. 자신을 키운 흙과 바람을 향한 그리움, 피붙이들을 향한 걱정과 근심, 돌아가지 못했다는 회한과 자책, 다시는 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 피폐해진 몸과 마음, 환상이 환멸로 변한 객지에서의 삶. 이 모든 정서가 폴로네즈 환타지 속에 뒤섞여 있습니다. 때로 그 굽이굽이 굴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이 눈물 너머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심한 정서의 이입이라고나 할까요.

조용히 그러나 우울하게 마음의 한 자락을 열어보이듯 곡은 시작합니다. 무한 자유를 향한 루바토rubato의 행렬, 그러다가 폴로네즈의 친숙한 리듬이 문득 작곡가의 자의식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 초기 도입부를 다루는 피아니스트들의 자세는 백인백색입니다. 루빈슈타인은 일단은 우아하고 균형 잡힌 여유로, 리히터는 직설적이고 비장하게, 아르헤리치는 거의 웅혼한 느낌으로 서두의 대비를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종류의 시작에 정해진 패턴을 강요하거나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도입부를 통해 연주자가 향수와 동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바로 드러납니다.
화성은 처음부터 정처 없지요.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강인한 폴로네즈 리듬과 마치 떠도는 영혼과 같은 무한 방랑 화음들은 서로 오버랩 되거나 껴안는 모양새로 전개됩니다. 다음 순간 사정없이 곤두박질치거나 높이 비상하면서 감정의 진폭은 확장일로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곡의 어디쯤 가면 ‘아, 이 사람의 병은 이미 깊을 대로 깊었구나! 치유 불가 아닌가.’라고 느끼게 만드는 어떤 서늘한 부분에 다다르게 되지요. 거기까지 오는 길도 파란만장했고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쇼팽은 궐기합니다. 전쟁의 기억, 당당한 민초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조국과 낭만을 향해 바치는 눈물어린 헌사. 마지막 외침이 벅차게 울려 퍼집니다.

(p.s. : 베토벤에서도 브람스에서도 그랬지만 쇼팽을 연습하다가 울면 지는 겁니다. 실제 연주 시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이상한 이율배반입니다. 작품에 깊이 개입할 필요는 언제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작품 자체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연주자는 작품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감상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울어도 되지 않을까요? 청중은 연주자보다 훨씬 편합니다.
쇼팽이 절절한 그리움으로 풀어낸 회한의 음악, 폴로네즈 판타지 앞에서 피아니스트는 일단 냉정해져야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작품은 기어이 연습자의 망막을 흐려지게 만들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