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2년 성서와 문화

희망이 있는 지옥을 위하여

성서와 문화 2012.09.18 14:07 조회 수 : 981

[김 수 우 ·시인]

 

 

『신곡』에서 단테는 이 지상의 이성을 지옥에 가둔다. 정쟁에 몰려 피렌체를 떠난 단테가 20여 년 유랑 속에서 집필한 이 대서사시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인간의 조건을 광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단테 자신이 삼림에서 헤매다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에 이르는 이 순례는 삶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다.
그중 지옥편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비추어볼 푸른 거울이 되지 않을까. 무신론자나 이교도를 비롯, 미식가와 폭식가, 재산을 모은 자와 낭비자, 신과 자연을 모독한 자, 유혹한 자, 아첨한 자, 반역한 자 등 역대 실존인물에서부터 신화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죄인들이 아홉 개 지옥의 층을 이루고 있다. 위정자와 세속에 물든 교황들을 조롱하고, 타락한 인간성을 야유하는 단테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고통과 고뇌를 통하여 영혼의 순화를 이룩하는 인생의 행로를 보여준다.
제1 지옥엔 호메로스, 헥토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등이 있다. 왜 그는 영웅들과 인간의 이성을 첫 지옥에 가두었을까. 그동안 인류가 공부해온 모험과 이성은 이제 삶을 구원할 수 없다는 데서 이 시대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상징하는 베르길리우스도 천국 여행에는 동행하지 못한다. 단테가 묘사한 월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에 이어 지고천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러 단계들은 신학적이지만 결국 종교성을 지향하는 수단으로 펼쳐진다.
문제는 희망이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문에 새겨진 문구이다. 지옥이 지옥인 까닭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저 무시무시한 지옥들은 사실 희망의 상실을 경험한 의식의 표현들이다. 어두운 지하세계나 외딴 섬, 영혼들이 형벌을 당하는 지하세계의 깊은 심연, 선하거나 악한 영혼들이 끊임없는 갈증을 느끼는 지하의 차갑고 어두운 곳 등은 결국 희망이 사라진 곳을 말한다. 고대인의 종교에서 죽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는 영혼의 종착지이다. 선과 악, 혹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존재상태나 장소가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 심판 후 저주받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거주하는 데가 지옥이라는 견해는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 등 서양의 종교들이 견지하고 있다.
지옥의 순례를 마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연옥으로 향한다. 연옥에선 선과 악에 무관심했던 자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잘못된 가치로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느님을 인식할 능력도 없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시달리는 지옥과 달리, 연옥에서는 처음부터 구원의 여명이 비치고 있다. 그것이 희망이 아닐까. 곧 종교성, 곧 이 시대에 필요한 영성이 결국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진리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시대이다. 이 문명에 구원을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리나 희망은 까마득한 우주를 과학적으로 추구하거나 물질의 풍요를 더 누리는 일에 있지 않다. 지옥에서 천국에 오르는 길이 끊임없는 희망이라면 인류의 모험과 이성은 희망일 수가 없다. 이제 구원은 어디서 올 것인가. 진정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종교성이다. 다시 영혼을 바라보는 일이다. 희망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믿음을 지니는 일이다. 이 믿음은 종교적 교리가 아니다. 보다 경이로운 우주를 경외할 수 있는 영성, 그 지극함이 곧 믿음이고 종교성이다. 종교성이란 내 안에 있는 보다 근원적인 세계를 기억해내는 일인 것이다. 희망은 그 근원적인 관계를 내가 실천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는 진리란 여기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곧 성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힌두교나 원시불교는 지옥에 대한 견해가 좀 다르다. 지옥은 영혼의 도정 가운데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며 환생還生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승 밑에 있는 스물한 곳의 지옥은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 결국 영혼은 ‘궁극의 영혼’에게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될 때까지 윤회의 인생을 보낸다. 힌두교에서도 영혼의 궁극에 오르는 길에 지혜, 행위, 믿음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믿음의 길이 가장 지고하다고 한다. 이것이 단테가 바라보는 영혼의 구원과 닮은 게 아닐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말이다.
희망은 ‘살림’의 형태이다. 희망이란 내 바깥의 다른 데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일만이 희망을 존재하게 한다.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준다는 말은 제 스스로 희망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 물질문명 속에서 내가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이 거대한 문명의 구조는 바로 지옥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린 올곧은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고통받는 삶에 더 집중해보아야 한다. 지옥에서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당면한 하나하나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불교의 지장보살은 희망이 되어주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지옥중생들을 모조리 제도하여 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지옥을 지키고 머무른다. 구원자가 있는 지옥. 한 마디로 희망이 열려있는 지옥인 것이다. 다시 영원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것. 이 지상에서 희망을 꿈꾸고 고뇌하는 자라면 지장보살 정도의 각오는 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장보살의 사상은 무한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어여뻐서 사랑하는 것이며, ‘비悲’는 가엾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착한 이는 어여뻐서 사랑하고, 미운 이는 가엾어서 사랑한다. 이 정도라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충분히 스스로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탐욕과 분열로 자꾸 거칠어지고 몰염치해지는 사회, 그리고 우리의 오래된 영혼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