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1년 성서와 문화

[김 용 수 ·조각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하는 도덕경 첫머리는, 수 천 년이 흘러도 세계 지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화두와 같습니다. 
여기서 도道는 하늘 땅 보다 먼저요, 무無라거나 무 이전이라 할 수도 없다 했습니다.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것입니다. 인식 밖의 일이니 언설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不立文字). 따라서 어떤 명칭을 붙여도 도의 본질과 사물의 본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름(名)은 그냥 이름일 뿐- 억지로 그냥 도라 했고 이름이라 했으니, 말에 구애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道는 언어가 끊기고(言語道斷), 분별이 사라진 경지(心行處滅)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말이나 문자를 떠나, 만물에 현현되어 있는 도를 몸소 체득 할 것을 첫마디부터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老子다운 역설이기도 하고, 우주자체가 역설을 넘어 설 수 없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일찍부터 터득하고, 진리를 전하는 방편으로 상을 세워 뜻을 전했는데(立象以眞意), 이것이 동양예술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象은, 단순한 상이 아니라 유무有無를 두루 껴안은 상象입니다. 무無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유有를 대립관계가 아닌 상생相生의 관계로 파악해 사물을 보되 유의 무됨을 보고, 무를 관觀하되 무의 사물 됨을 보는 것입니다. 곧 유무는 서로 낳게 하는 것(有無相生)이요, 드러난 것과 숨겨진 세계는 틈이 없다(顯微無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현들이 천지를 살핀 세계가 그대로 화법畵法이 됩니다. 무법으로 법을 삼아(以無法爲法) 대상을 그리는 것이 사의정신寫意精神입니다. 사寫는 바깥 사물을 그리는 형사形似를 말하는 것이요, 의意는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는 정신精神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의정신에서 방점은 의意에 있습니다. 뜻은 형태가 없는 것이니, 그림의 대상에 묶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실實보다 허虛에 무게를 둡니다. 대상을 그리되 외피를 그저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소양과 수신의 총체로서 인격을 그려야 하므로, 그만큼 작가의 자유경지가 돋아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나타납니다. 이때 정신의 기조가 나타납니다. 동양에서 정신精神은 땅의 빼어난 기운과 하늘의 맑고 밝은 기운의 조화를 말하는 것으로, 정신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논할 때 쓰는 말입니다. 순 우리말로 ‘얼’이라 합니다. 

사의정신은 내면의 성찰을 통하여, 걸림 없는 길을 모색하는 선사상禪思想의 발전과 그에 따른 성리학性理學의 반격으로 형성된 사상체계의 고양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흔히 사의는 화원화가에 대치되는 문인文人들의 여기餘技를 표방하는 의미로 시작된 것이나, 후대로 가면서 동양예술의 중심 개념으로 된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추상정신抽象精神을 싹틔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최초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추상 동인動因으로 말한 ‘내적필연성’은 동양미술의 사의 표현에서 ‘의意’와 대차가 없습니다. 
추상미술의 본질은, 순수한 조형요소(색, 선, 면 등) 만을 사용하여 형상을 없애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젠 기술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 즉 정신세계가 관심의 핵으로 떠오릅니다. 한편 동양선비들은 대상 너머의 대상을 관하여, 화제가 마음에 익어야 붓을 들었습니다. 즉 내적 동기가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형상을 유추한다거나, 또는 형상을 뽑아낸다는 추상抽象이란 단어는 부적절해 보입니다. 오히려 뜻으로 만 보면 사의寫意라는 말이 더 적절치 않나 생각합니다. 이점에서 보면 동서양 정신이 천년의 세월을 두고 만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 추상미술의 출현은 자기역사를 부정해야 하는 산고를 겪고 태어난 것입니다. 물리학의 진전에 따라서 시공 관이 바뀌고 유클리드 기하학에 기초한 공간개념이 흔들리면서, 서양 미술은 새로운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을 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핵분열의 소식을 접한 칸딘스키는 “나에게 있어 핵분열은 전 세계의 분해와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두꺼운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고 술회 한 바 있습니다. 
자기부정을 통한 진리의 구현이 동양에서 일반화된 것은, 천지에 관한 자기정립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서양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수정해야 하는 현실에 봉착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요동과 부조리한 문제를 다루는 제 현상은 모두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이것은 동양 선현들의 세계관이 우주이법과 합치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은 추상정신을 일찍 배태하고 있었으면서도, 자기 동력으로 형상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기정체를 벗지 못하고 서양의 충격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존재(有)에 바탕을 둔 문화에서 추상抽象이 출현하여 대세를 이뤘다는 것은 되새겨 볼 문제입니다. 

작품 세계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 작가의 고양된 정신세계가 작품의 격과 질을 가름한다면, 사의정신은 오히려 현대에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각가 김종영金鐘瑛과 최 종태崔鐘泰의 작품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영은 한국 추상조각의 태두이자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면서 한국현대 미술의 초석을 다진 교육자였고, 최 종태는 김 종영의 혼을 이은 문하생이자 한국정서를 보편미학으로 풀어낸 작가입니다. 
김종영은 선비의 품성으로 사의정신의 근본을 꿰뚫어 묵필에 시연하고, 종국에 추상조각에 그 세계를 구현했습니다. 김종영의 작품은 단백 합니다. 서두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색의 긴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가 얼마나 문인화적 소양을 다졌는지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최종태는 지성의 힘으로 사의정신의 요점을 파악하여 형태에 압축했습니다. 한 사람은 형상에서 추상으로 가고, 한사람은 형태에 추상의抽象意을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미술사에 동양의 사의정신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종영은 중용中庸의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바탕으로 마음의 사특함을 떨어냈고, 최종태는 천상의 맑고 깨끗한 본원의 마음을 따라갔습니다. 
김종영은 물성의 특질을 요해하여, 최소한의 기교로 대상을 압축 표현함으로써 작품에 절제된 생명이 배어 있다면, 최종태는 질박한 형태에 기교를 묻음으로서 형상을 넘어 버렸습니다. 
불가의 법맥이 수승한 정신의 사표가 되는 것처럼, 김종영과 최종태는 사제의 인연이었으나, 뜻을 나누면서도 제자는 스승의 그늘에 묻히지 않고 서로를 밝히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원래 스승의 가르침은 말이 없는 것입니다.(行而不言之敎) 단지 제자를 위하여 가까운 공간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때 수용자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스승의 헤아릴 수 없는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뜻입니다. 김종영과 최종태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만약 서양 조각사에서 부르델과 마이욜이 없었다면 로댕의 빛은 반감되듯, 스승도 제자가 클수록 따라 빛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 무형의 가치를 우선하는 것은 동서의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정신의 숙성 도에 따라 달라 질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인물도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난의 시절에 한 스승과 제자가 뜻을 이어 맥을 이루었으니, 우리도 과히 슬프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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