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1년 성서와 문화

은발銀髮 선생님

성서와 문화 2011.12.23 18:31 조회 수 : 2649

[허 영 수 ·소설가]

 

 

  41년 전, 나는 대구 T상고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T상고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했으나 두뇌는 명석하고 매사에 성실했다. 부임 첫날 환영회, 내 옆자리에 머리는 백발인데, 얼굴은 홍안소년인 백발선생님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그 후 백발선생님과 나는 나이를 뛰어넘어 의기투합意氣投合했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님은 내 가슴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백발선생님은 나에게 명령(?) 비슷한 충고를 했다. 자기는 백발이 아니라 실버라고, 윤기 있는 멋있는 실버이니 앞으로는 백발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 후로 백발선생님은 은발선생님이 됐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가 내 숙직 날이었다. 그 때 나는 이 학교 막내고, 총각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무슨 축제일이나 되듯이, 밤이 새도록 퍼마시고 소란을 피우던 그런 시절이다.
무료하게 숙직실 전화통 앞에 앉아 있는 데, 저녁 6시쯤, 숙직실 문이 열리며 허공公, 은발선생님은 나를 허공이라 부르면서 사모님과 함께 큰 보따리를 들고 왔다. 보따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5곡밥과 정월 보름날 먹는 여러 가지 반찬이 들어 있었다.
선생님과 나는 늘 만나면 하던 버릇대로, 그 지루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내용보다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다는 것이 행복한 듯했다. 방금 했던 말을 또 하고, 어제했던 말을 되풀이 하며 별 웃을 일도 아닌데도 크게 웃고 했다.
사모님이 은발선생님을 타이르듯 말했다. “젊은 허 선생을 오늘 같은 날 숙직하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내가 가서 대신해야 한다고 왔는데, 언제 허 선생은 해방됩니까?”라고 했다. 그제야 내외분이 오신 사연을 알게 됐다.
쫓기 듯 숙직실을 벗어났다.

 

이듬해 3월, 은발선생은 나의 학부모가 됐다,
내가 담임이 되고 1개월도 안되어, 사고를 저질렀다. 귀가 길에, 동네 아이들과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생활지도부 선생님과 나는 즉시 현장에 달려가서, 우리 반 학생 3명을 학교로 데리고 왔다. 그때 T상고 교칙은 엄하기로 유명했다. 며칠 후면 선도위원회를 열어 1주일 동안의 정학처분을 내리게 된다.
그 다음날 은발선생님 자리는 비어있었다. 평소 결근을 한 적이 없었던 일이라 어떤 변고라도 있나 해서, 퇴근길에 선생님 댁을 방문했으나 부재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대나무 같은 선생님의 고집이 미웠고, 배신당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은발선생님은 그때 “자식 교육도 못 시키는 놈이 어떻게 교단에 서나”가 이유였지만, “허공이 나를 보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고,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나.” 하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고 한다.
은발선생님은 남을 용서하는 데는 관대하면서 자기에게는 추상같은 분이다. 젊은 교사를 돌봐주고, 사랑할 줄 아는 순정純情의 교육자였다.

오늘도 전국 교원노조원들이,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데모를 하고 있다. 이를 비판하고, 규탄하는 대회도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열리고 있다. 대학교마다 사범대학이 있고, 교육학 박사도 많은 데도, 나라 교육이 40년 전보다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변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보석처럼 빛나는 양심, 남을 책하기 전에 먼저 반성하고, 자기를 단속하는 은발선생님, 자식의 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치부하고 책무 하는 선생님의 옹고집. 이런 고집들은 제발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6 키엘케고어를 생각한다 -그의 156주기를 맞아 -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695
35 사랑이와 슬기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841
34 이신李信을 통해서 본, 현대 전위예술과 기독교 신앙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894
» 은발銀髮 선생님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649
32 길 - 걷는 길, 물류物流의 길 그리고 인도人道 -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770
31 <세속도시>의 진가眞價를 찾아서 (Ⅱ)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629
30 한국 고전시가古典詩歌에 나타난 자연관自然觀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767
29 조시마 장로의 강기슭 풍경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736
28 음악 片紙 ⅣⅩ 그리스도께 바치는 최고의 음악적 헌사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668
27 九旬有感구순유감 file 성서와 문화 2011.12.23 2554
26 따뜻한 십자가十字架 - 김효숙金孝淑의 브론즈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3397
25 음악 片紙 ⅢⅩⅨ 20세기 음악과 영성靈性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3278
24 도둑질하지 말라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3103
23 제주의 자연과 더불어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3208
22 암스테르담의 추억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2908
21 <세속도시>의 진가眞價를 찾아서 (Ⅰ)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2969
20 초막절과 한가위 file 성서와 문화 2011.09.27 3462
19 예술가의 보람과 소명 -다섯 번째 “성서와 문화 미술동인전”에 부쳐- file 성서와 문화 2011.06.17 3422
18 마음을 비치는 그림 file 성서와 문화 2011.06.17 3188
17 사의정신寫意精神과 추상정신抽象精神 - 조각가 김 종영과 최 종태의 세계 - file 성서와 문화 2011.06.17 3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