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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마 장로의 강기슭 풍경

성서와 문화 2011.12.23 18:27 조회 수 : 2723

[허 만 하 ·시인]


지친 사람들은 물가를 찾는다. 나그네가 봇짐을 내려놓고 짚신을 벗고 발을 씻는 것도 강에서다. 공자가 냇가에 이르러 흐르는 물을 보고 하신 말씀이 “가는 자 이와 같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逝者如斯夫,不舍晝夜)”였다 한다.(『논어 자한편』)
이‘가는 자(逝者)의 뜻이 사람에 따라 더러 다른 것을 보기는 하나, 대체로 세월이란 개념에 머무는 것 같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철학적인 분위기에 젖는 공자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이 대목은 『논어』에서 인상적인 대목이다. 공자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물가에서 쉬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절필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조시마 장로의 회상은 흐르는 물가에서 이루어진다. 이 장편소설의 복잡한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도 조시마 장로의 은은한 인품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매화향기처럼 그윽하게 풍기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조시마는 교회의 눈부신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조용히, 그러면서도 정열을 담아 말하는 것은 자연과의 사귐이다. 젊은 시절 조시마는 안핌이란 신부와 함께 수도원을 위한 희사를 걷으며 러시아 전역을 떠돈다. 그는 그 여행에서 온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살아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자연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생기를 나누어 주는 신의 세계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 지상의 세계는 신의 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그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느 여름날 그는 큰 강기슭에서 어부들과 함께 노숙한다. 눈앞에는 끝없는 시간을 싣고 고요히 흐르는 물과 광활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풍경이야 말로 신이 만드신 세계란 사실을 실감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풀도 개미도 꽃을 찾아 윙윙거리는 벌도 모든 것이 신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조시마에 의하면 신의 표현인 자연과 만나고 사귀어, 만물이 큰 공동체의 생을 영위하고 있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이‘사는 즐거움’의 원천인 것이다.
김춘수가 이 지상의 모든 것이(바퀴벌레 까지도) 천사의 표현이라 느낀다고 나의 전화질의에 대해서 대답했었다. 언제부터 시인 김춘수가 이런 특이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것이 행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조시마 신부의 강기슭 계시와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 말하기도 힘들 것 같다. 그의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1997)는 그럴 가능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조시마 장로 보시오」의 끝 구절 “어찌하면 좋은지 알려주시오”란 구절이 조시마 장로의 자세에 부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시마 장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철학적 신학적 이론에는 큰 관심을 베풀지 않지만, 말에 의한 직접적인 사람의 도움에는 비상히  열정적이고  유능했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조시마 장로를 한번 뵙고 위로의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많은 농촌 여인들이 멀고도 먼 고장에서 조시마가 살고 있는 수도원을 찾아온다. 이 여인들을 만나는 일이 조시마의 일과인 것이다. 조시마는 저마다 무거운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여인들의 호소를 듣고 간결하고 적확한 조언을 준다.
그것은 높이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무지에 맞추어 일부러 비하한 말도 아니다. 한 젊은 여인은 조시마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비밀을 호소한다. 여인은 떨고 있다. 조시마는 여인의 공포가 남편의 죽음에 관련되는 일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곧 “잠시 기다리시요” 하고 재빨리 자기 귀를 얼른 여인의 입가에  갖다 대어 둘레의 아무도 엿듣지 못하도록 여인의 고백에 귀 기울인다. 그 고백을 다 듣고 난 뒤 “두려워 마시오. 후회하고 있는 자를 하나님은 반듯이 용서하여 주신다”고 이르고 자기 목 십자가를  여인에게 걸어 준다. 그에게는 아무런 카리스마 성이 없다.   
돈 앞에 한정 없이 교활한 색한 표트르 카라마조프가 조시마 장로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작품을 쓴 시인 김춘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조시마 장로의 인품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소설에는 만년의 조시마 장로의 모습이 자상하게 그려져 있다. 65세의 병든 조시마 장로는 죽음이 가까운 것을 느끼고 40년전 젊은 육군 장교였던 자신이 왜 갑자기 수도승이 되었는지를 가까운 제자들에게 들려준다.
김춘수 시 연구에서 그의 제13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는 돌파해야 할 한 굽이다. 나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집이다. 그러나 이 관문을 뚫고 지나지 않으면 그의 「꽃」도  올바르게 읽는 것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71년 노벨문학상 기념강연 (본인이 출국할 수 없어서 수상식 단상에서 읽혀지지 못했던 강연)에서 솔제니친은 먼저 “세계를 구하는 것은 미美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아포리즘을 인용했다. 진眞도 선善도 그 무력함을 드러낸 현대에 있어서 미(예술)가 이들 역할을 대행할 것을 기대한다는 취지였다. “세계를 구하는 것은 미다”란 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뮈시킨 공작의 말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독일의 시인  실러가 했던 말이라 한다. 조시마가 강기슭에서 어부들과 함께 보았던 것이 미( 아름다움)이었다.
이성과 수학의 엄밀성에 의하여 발전해 온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한계에 대한 반성이 솔제니친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나는 우리들에게 뜻 깊은 시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미적=감성적 인식은 관념이랑 기호의 매개 없이 이루어진다. 릴케가 무서움의 시작이라 말했던(『두이노의 비가』) 미는 과연 무엇인가. 강기슭에 펼쳐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발견했던) 조시마 장로는 각별히 “석양의 비스듬한 빛”을 사랑했다. 그 빛이 이 지상의 생활이 영원한 진리와 이어져 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지만, 나는 그 빛이 인간에게 평소 잊어버리고 일상에 묻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최후’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란 나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역행 불가능한 시간적 존재자로 파악하고 있다.(『존재와 시간』현대에 이르러 영원성이 붕괴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그의 『존재와 시간』이 말하는 바의 날카로움과 깊이는 더 절실한 성격을 띠는 것을 느낀다.
 
과학적 세계상, 또는 유물론적 세계상은 풍경을 말살했다. 풍경은 자아와 세계의 심미적 관계에서 성립한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행위다. 풍경의 문화적 성격에 대한 문화적 고찰은 더러 있으나 우리가 만나는 인간 경험의 살아있는 한계상항에 자리하는 풍경에 대한 고찰들은 손가락 사이를  모래처럼 새어나가기 일수다.
풍경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실존적이다. 조시마 장로가 어느 강기슭에서 만난 풍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세잔과 생 빅트와르산과의 만남도 그렇다. 그들에게 그 특정한 풍경과의 만남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풍경과의 만남은 거의 순간적인 것이다. 순간은 덧없고 여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의 원둘레에 닿는 때 그 순간은 유일무이한 역사적인 것이 된다. 우리들은 이런 순간에 어떠한 시간의 흐름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장소에 서는 것이다. 일상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비약인 것이다. 그것은 번개의 번뜩임 같은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안으로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가치라는 소신을 품고 그 어두컴컴한 그늘을 그의 작품에서 그려내었던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가, 고뇌에 찬 영혼의 구원이란 중대한 문제를 빵의 문제로 바꿔치기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 햇살 고운 통영 바닷가에서 대여 김춘수와 함께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야기 했던 화가 전혁림의 바다 물빛은 그런 그늘을 여과한 해맑음인 것이다.
그들은 사나운 바람 부는 북만주에서 돌아온 청마를 둘러싸고 〈통영 문화협회〉를 조직했었고 김춘수가 사무장 일을 착실하게 볼 때였다고 전화백은 그의 글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 글은 김춘수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자료다. 전혁림 화백은 한때 부산의 동광동(중부서에서 가까운) 조그마한 여관방을 빌려 제작에 열중한 적이 있다. 대청동 메리놀 병원에서 일하던 나는 시간을 내어 휘어지는 비탈길 밑 그 방을 찾았었다. 한두 번 그는 병원으로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만나면 우리는 예술을 이야기 했었다. 이따금 도스토예프스키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었다.
그는 뜻밖에도 부산의 전시회(한번은 도화전陶畵展이었다.) 팜프렛트에 짤막한 나의 글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내가 화가 전혁림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것은 2004년 가을의 일이다. 뜻밖에도 그가 나의 청마 문학상 수상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구겨진 등산모를 쓰고 있었다.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오른 김춘수 시인도 그날 뵌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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