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김 순 배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가공(可恐)할만한 테크닉과 더불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음악성이 빚어내는 파도 같고 산 같은 거장성(virtuosity)으로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최근 내한연주를 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무대에서는 그 강렬한 연주가 빚어내는 얼얼한 임펙트로 최근 수년 간 청중들을 사로잡아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2010년 독주회가 처음입니다. 이렇다 할 국제콩쿠르 이력도 없고 일찍부터 주목받은 신동(child prodigy) 출신도 아니 볼로도스가 일으키고 있는 일종의 신드롬,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지요.
볼로도스는 여러 면에서 클래식 음악계의 ‘상식’을 깨뜨리는 피아니스트입니다. 1972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태생인 그의 양친은 모두 성악가였다지요. 자연히 어린 시절 처음 접한 것도 ‘노래’였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진학하면서 택한 전공은 지휘였구요. 비록 여덟 살 (이것도 여느 피아니스트들에 비하면 결코 이른 나이는 아닙니다.)때부터 꾸준히 쳐 온 피아노였지만 볼로도스가 연주가로서의 길을 가기로 정식으로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라흐마니노프가 20세기 초입 직접 연주한 음반을 듣고 모종의 영감을 받은 직후라고 하니 볼로도스의 피아노 입문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운명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파리 콘서바토리 그리고 스페인의 마드리드 음악원 등지를 거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급속도로 발전시키게 되지요.

23세 때이던 1995년 소니 음반 담당자의 눈에 우연히 띤 이후 볼로도스의 행보는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라고 할 만합니다. 1997년 가을 그는 첫 앨범 ‘피아노 편곡집(Piano Transcriptions)’를 들고 클래식 음악계에 당당하게 출사표를 던지지요. 특히 이 앨범에 수록된 그 자신이 편곡한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의 현란하고 압도적인 매력은 단번에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세계적인 연주 홀에서의 초청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발매하는 음반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그라모폰 어워드, 에코 클라식상, 디아파종 도르 등을 수상하게 되지요. 베를린, 뮌헨, 뉴욕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이스라엘 필하모닉, 시카고 필하모닉, 보스턴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 또한 볼로도스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재래(再來)’ 와 같은 표현으로 지칭되고 있는 볼로도스이지만 신기에 가까운 테크닉과 함께 윤택하고 풍요로운 음색과 음량, 여유롭고 순발력 있는 호흡, 그리고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해석은 그의 리스트,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더욱 다채롭고도 깊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성악과 지휘공부의 경험까지 곁들여진 볼로도스에게는 피아니스트로서 필요한 다면성이 이미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요. ‘호로비츠의 재래’라고 한다면 볼로도스는 한층 더 ‘다채로워진 호로비츠’ 라고나 할까요? 이미 그가 발매한 다섯 장의 음반 속에서 볼로도스의 이렇듯 출중한 면모는 뚜렷이 감지되지만 향후 그가 들려줄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첫 내한 연주를 설레임으로 기다리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지요.

이렇게 기다리던 볼로도스의 연주회 날의 현장 스케치입니다. 무한한 음악적 에너지를 내장한 한 남자가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통상적 피아노 벤치가 아닌 등받이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그의 손끝에서 음울하고 선 굵은 서정이 우직하게 흘러나오는군요.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신비주의 작곡가 스크랴빈(Scriabin)의 소품들입니다. 진한 페달이 유난히 귀에 잡히네요. 그것의 몽환적 효과는 프렐류드를 지나 드물게 연주되는 ‘느릿한 춤’과 ‘화환’에 이르러 극대화됩니다. 짧지만 매혹적인 작품들이지요. 첫 스테이지 마지막 곡 ‘소나타 7번, 하얀 미사’에서  볼로도스는 작곡가의 난삽한 정신세계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합니다. 스크랴빈의 신음은 볼로도스의 손에서 더욱 고통스럽게 재생되고 신비주의에의 경도(傾倒)는 아스라한 환청으로 청중의 귓전을 울립니다.  육감(六感)에 의한, 비수로 찌르는 듯한 연주라고나 할까요. 스크랴빈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에게는 하나의 숙명이지만 볼로도스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슈만에서도 스크랴빈의 잔향이 진하게 묻어있었다는 점입니다.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슈만의 음악이지만 이렇게까지 몽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결국 이는 해석의 각도와 농도에 달려 있는 것 같더군요. 또 하나 슈만을 들으며 가슴이 철렁해보기도 처음이네요. 사실 볼로도스의 모든 연주에서 가슴 철렁한 순간은 자주 있었어요. 시리도록 명징한 아웃라인, 능숙하고 적확한 성부간의 균형, 너무 선명해서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들렸던 강약 대조, 폐부를 찌르는 베이스 라인의 강렬함 그리고 때때로 심하게 과장된 악센트들에서 듣는 이의 가슴은 자주 서늘함과 철렁함을 동시에 느껴야했습니다.

후반부는 20세기 스페인의 작곡가 몸푸(Mompou)의 ‘어린이 정경’으로 시작되었지요. 인상주의와 민속풍이 적절히 혼합된 재기 넘치는 이 작품에서 볼로도스는 여전히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습니다. 리듬과 음색의 자유로운 조절이 빚어내는 현란한 색채감은 발군이었지만 정서적인 무장해제가 조금은 아쉬웠던 연주입니다.
이어진 또 다른 감각의 스페인, 알베니즈의 ‘La Vega(대지)’는 이 날의 연주 중 단연 빼어난 것이었습니다. 반복되는 플라멩코 리듬 위에 화려하게 흐르는 패시지가 첨가된 단순한 작품으로만 알았던 이 곡이 이토록 시적(poetic)으로 들릴 수 있다니 놀라웠지요. 미묘함의 극을 추구하는 루바토(*템포의 자유로움)의 골짜기 사이사이에 포진한 보석 같은 음의 반짝임은 새로운 음향의 대지로 모두를 데리고 가기에 족했습니다.
마지막 곡 리스트 ‘단테 소나타’의 어떤 부분에서는 볼로도스 특유의 스케일 큰 호흡이 아쉬웠지만 전광석화 같은 강렬함으로 몰고 가는 음악적 추진력의 위용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엔딩 부분의 전율할 만한 왼손 베이스 트레몰로를 모두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텍스처가 두터운 이 곡에서 소리의 각 레벨들은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고 자유로운 독백 부분의 설득력은 모방불가였어요.
이 날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7개의 앙코르곡들이었지요. 바흐, 차이코프스키, 알베니즈 등 서로 다른 스타일과 분위기의 앙코르곡 퍼레이드는 청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후폭풍을 일으키기에 족했습니다. 본 프로그램에서처럼 앙코르 곡에서도 그의 스페인 사랑은 계속되더군요. 이 날 청중들은 확인했습니다. 볼로도스는 가히 신들린 연주자임을. 그리고 그것은 깊고도 강렬하고 진솔한 예술혼에 다다라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임을 온 감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 미륵의 미소 file 성서와 문화 2010.03.29 2838
31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Ⅰ) [4]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4 2632
30 장공(長空) 김재준의 ‘성령찬가’ [1]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558
29 위대한 영웅 마하트마 간디(Ⅱ) - 그의 원체험(原體驗)과 사상 - [18] 성서와 문화 2010.12.27 2523
28 맑고 순수한 영혼의 노래를 그린 이 남 규 화 백 [3]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509
27 난곡(蘭谷) 조향록 목사의 그 지극한 삶을 기억하며 [1] 성서와 문화 2010.06.25 2484
26 역사의 자연화, 자연의 역사화 [2] 성서와 문화 2010.10.03 2479
25 미수米壽와 미수美壽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475
24 나의 금강도金剛圖 - 고구려의 하늘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448
23 향기 나는 사람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444
22 하찌우마(八馬理) 선생님 성서와 문화 2010.12.27 2443
21 공주의 조팝나무 성서와 문화 2010.12.27 2428
20 음악 片紙 ⅢⅩⅣ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424
19 봄 바다, 그 심연의 빛들 file 성서와 문화 2010.03.29 2422
18 빛으로 가는 길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362
17 산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과 [3] 성서와 문화 2010.12.27 2356
16 한국 최초의 신학자 탁사(濯斯) 최병헌 - 유교와 기독교의 경계를 넘어서 -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347
» 음악 片紙 ⅢⅩⅢ 피아니스트 볼로도스 성서와 문화 2010.03.29 2343
14 음악 片紙 ⅢⅩⅤ 책으로 엮인 음악편지 [3] 성서와 문화 2010.10.03 2343
13 마魔의 벽을 넘고 있는 그릇 - 도예가 이종수의 세계 - [1] 성서와 문화 2010.12.27 2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