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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바다, 그 심연의 빛들

성서와 문화 2010.03.29 16:12 조회 수 : 2420

김 수 우 ·시인

 

 

봄빛이 번져가는 아침바다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삶의 경이에 사로잡힌다. 반짝반짝 물비늘 그득한 바다는 구약 에스겔 47장에서 묘사되는 물의 환상 그 자체로 다가온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동으로 남으로 북으로 흘러 발목이 잠기고 무릎에서 허리에 오르고, 마침내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어 거기 생물이 번성하고 많은 물고기가 뛰노는 푸른 물결, 그 창일한 생명성은 얼마나 감동스러운가.
동시에 그 눈부신 표면을 살아있게 하는 건 깊은 심연임을 깨닫는다. 멀고도 깊은 데서 일어나는 한 울림이 금빛 파도를 만드는 것이리라. 물살 한 올 한 올에 빛의 날개를 꿰매고 있는 어떤 손길이 감지된다.
물비늘은 그렇게 깊이에서 보내는 파장, 무한한 무선신호가 아닐까. 아득한 심연에서 누군가 생명의 등불을 켜서 자꾸 올려 보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바다를 통통통 돌아오는 작은 고깃배를 보면 마음은 다시 숙연해진다. 기술문명의 첨단 속에서 아직도 심연을 긷고 사는 그들의 일상이 삶의 진정한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심연에서 끊임없이 울려나는 것들이 무엇일까. 성실한 노동과 겸허한 사랑, 낮은 눈빛과 고단한 근심들, 경외와 경이 그리고 아무리 힘겨워도 놓을 수 없는 그 무엇들.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잃어버리고 있는 종교성이 아닐까.
종교란 삭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돋은 겨울눈과 같다. 오래 기다리며 근원을 갈망하는 자연인 것이다.
숨어서 빛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보물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값비싼 금은보화를 보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 인간을 확신하게 하는 것, 존재를 예감하게 하는 사랑과 희망, 용기와 슬픔 등이 모두 보물이다. 우리를 진정 살아있는 자로 살게 하는 그 모든 탯줄이 종교성인 것이다.
그러다 바로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로 도심이다. 신호등이 너무 많다. 아파트와 복잡한 도로들이 함부로 엉키어 오만한 도시를 만들고 있다.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많은 것들이 소외된 그 사이로 소비가 넘친다. 해일처럼 닥치는 소비적 정보에 인간의 영성은 매일 무너진다. 물신화와 정보화에 밀리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장 본래적인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서 주인공 부피에는 밤마다 굵은 도토리씨앗을 가린다. 작은 등불을 켜놓고 도토리를 고르는 그 거친 손이 바로 이 시대가 잊어버린 종교성은 아닐까.
뒷골목에서 폐지를 모으느라 굽은 허리를 있는 대로 구부리고 박스를 묶는 노인의 손도 그렇다. 예수님 앞에 동전 두 닢을 헌금하는 가난한 두 과부의 손도, 천 원에 일곱 개의 풀빵을 건네는 늙은 풀빵장수의 손도 마찬가지. 그 손등의 불거진 핏줄이 이 세기 우리가 모든 걸 무릅쓰고 찾아야 할 종교성인 것이다.
겨우내 베란다에서 비척비척 말라가던 화분이 문득 틔우는 새 움이나, 시 한 편을 위해 밤새 지우고 쓰는 시인의 언어, 앞에서 환하게 웃다가 뒤에서 몰래 짓는 고통의 눈물, 이별한 연인이 그리워 하염없이 모래밭을 걷는 발걸음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절실하고도 소박한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어떤 보석일까.  
광산에서 막 캐어온 원석은 우툴두툴한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빛들이 내장되어 있는가. 우리가 타고난 종교성도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고뇌하고 상상하고 꿈을 꾸고 기도한다. 이 감수성이 우리의 영혼을 만나는 방식이며, 타자의 관계와 그 의미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가난한 자들, 장애를 가진 자들, 병든 자들은 원석이다. 부자나 교만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 숨어서 빛나는 것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두 손이 비어있는 사람들은 꿈을 꿀 줄 알고 대지가 은폐하고 있는 무수한 비밀들, 하늘이 드러내려는 별의 신비를 함께 읽는다. 그들은 대상 속에 현존하는 정신적 가치를 찾아낸다. 숨어서 몰래 빛나는 그들이 심연이다. 그들이 존재의 빛을 켜서 끊임없이 봄 바다로 올려주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다고 말한 사람들이다. 하늘이 바로 저희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표면은 완결이 아니며, 실체란 규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니기도한 빛이 삶의 밀도를 이루고 있다.
에스겔이 물이 솟는 것을 본 자리는 지성소가 아니라 문지방이었다. 문지방이란 경계, 바로 일상이 시작되는 자리인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 함부로 치우치지 않는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도 희망도 시작된다.
이 감춰진 모든 것들은 대화적이다. 실상을 꿰뚫어보려는 마음의 힘, 대화적인 깨달음이 바로 종교성이다. 숨은 보석들은 숨은 보석들을 발견할 줄 안다. 그들은 보이려고 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는 삶보다 보이지 않는 삶이 가지고 있는 빛을 알기 때문이다.
깨어진 사금파리 한 잎도 짧은 햇살에 온몸으로 존재를 발휘한다. 숨어서 빛나는 것들도 온몸으로 가치를 발휘한다.
그 발휘는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주위를 환히 밝혀 주변의 존재감까지 끌어낸다. 삶의 표피에서 산란하는 빛이 아니라, 깊은 데에 번져 나오는 빛이다.
이 빛은 생명의 역사를 관통한다. 숨어서 빛나는 삶에 대한 자긍심, 이것은 곧 종교성이다. 철학도 예술도 결국은 인간의 영혼성에 귀결되는 게 아닐까.
사람을 사랑하는 진정한 기도는 성속을 뛰어넘는 진리에 있다. 모든 실용주의를 뛰어넘는 영혼의 염려에 있다. 무조건의 믿음이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그리하여 자연적 호흡을 길어내려는 선량한 의지에 있다. 그리고 ‘영혼’으로서의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천상적이면서도 대지적인 그리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꾸어야할 봄 바다, 그 심연 같은 종교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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