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마끼우찌 유키히코(牧內雪彦) ·전 일본 日刊스포츠 부장 / 희곡작가

 

 

젊은 나날은 멀리 시라지고, 친했던 벗들도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저 멀리서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중학생 무렵 처음 배워 애창한 영어 노래가 이 <Old Black Joe>였어요. 그러나 가사의 의미나 내용에는 전연 무관심해서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외국어로 노래한다는 신선한 만족감과 젊은 무지(無知)의 환희에 도취해 있었던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지금 후기고령자(後期高齡者: 일본에서는 이런 무례한 용어로 노인을 차별한답니다.)가 되고부터는 그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로 시작되는 가사, 작곡자 Foster는 유명하지만 작사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얼마전, 형의 갑작스런 오랜만의 방일(訪日)에는 놀랐습니다. “일본에로 혼자 여행이 가능한가를 생체실험(生體實驗)하는 각오로 왔답니다.” 라는 것이 첫 대면의 형의 인사였지요. 이 용감하고 믿음직한 말과 행동에 나는 감동했습니다. 작년 형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 입원과 통원치료를 했다는 소식이었고, 나의 신변에도 슬픈 일들이 겹쳐서 기력을 잃고 있었던 터라 이제는 우리의 방문재회(訪問再會)는 무리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체 테스트’ 라는 형의 이번 방일에 용기를 얻어 나도 만기가 지난 패스포트를 다시 살려 오랜만의 방한(訪韓)할 것을 결심했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네 가지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지식만의 개념이었던 생·노·병·사를 지금은 직접 피부로 느끼는 나이가 된 것이지요. 나의 동급생(同級生)도 3분의 1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3분의 1이 건강이 좋지 않아 외출이 불가능합니다. 남은 3분의 1인 우리들이 만나 회고담을 꽃피우지만, 어느새 병이나 죽음으로 화제(話題)가 기울어집니다. 이것이 만년의 광경이지요.

화제를 바꾸어 우리들의 한·일 우정의 회고담을 쓰기로 할까요. 마음에 남은 광경이 겹쳐 잇달아 우러나오는군요. 잊은 풍경이 많다 해도 추억은 그리운 것입니다.
얼마 전 형이 선물로 준 DVD <금강산>의 멋진 풍경을 보면서 나는 그 옛날에 갔던 설악산의 여름을 떠올렸습니다. 금강산과 설악산은 같은 산맥으로 이어졌다지요. 나는 일본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바다보다도 산에 친근미를 느낍니다. 무언가 고민스런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라도 산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하고 안도감(安堵感)이 넘칩니다. ‘보라,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성서의 깊은 뜻은 이해할 수 없지만 좋은 시구(詩句)로서 산을 올려다  보고, 산들의 모습에 신비스러움과 친애감(親愛感)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설악산 기슭의 소박한 여관에서는 두 소녀가 마주 앉아 소리 높이 다듬이질 하는 풍경을 본 것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몇 년 후에 다시 찾았을 때는 완전히 관광지로 변해, 그 다듬이질 하던 여관의 장소도 알 수 없을 만치 달라져 버린 데는 아연했으나 설악산의 변치 않은 불변(不變)의 모습에 마음의 위로가 되더군요.
형이 거주하는 대전에서는 구봉산(九峰山) 중턱에서 멧돼지 숯불구이를 대접받고 솟아나는 청약수(淸藥水)를 마시고, 그리고는 계룡산을 안내해 주셨지요. 훈풍과 녹음의 5월이었습니다. 동학사까지는 벚꽃 가로수의 긴 오르막길을 대화를 나누면서 걸었던 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주차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하늘에는 크고 둥근달이 떠 있었습니다. 보름이었습니다. 향긋한 냄새가 나서 나무를 처다보니 흰꽃이 만발하고, 달밤의 음악회를 즐기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요란스러웠지요. 그 밤의 정경(情景)은 한폭의 명화처럼 지금까지도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다행하게도 한국의 사람들과 풍물(風物)로부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보물을 듬뿍 받았습니다. 벌써 40여년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관부 패리(정기연락선) 취항의 뉴스를 듣고 호기심이 왕성하며 자동차 운전을 무척 좋아하는 친구 K군과의 여행, 그것이 첫 한국 방문이었습니다.
지난번 형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을 관람한 후, 형이 좋아하는 미소우동을 먹으면서 책이 화제가 되었지요. “마음의 재산, 추억은 그대로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지만 사랑하는 책들은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어쩌지요.” “참말로 곤란하군요.” “책은 우리에겐 보물더미지만 관심없는 사람에겐 쓰레기 더미.” “하하하, 책 처분이 우리들의 인생 최후의 고민이라니 우습구려.” 이런 대화도 ‘만년의 광경’이었습니다.
한국도 일본도 눈이 어지럽게 과학문명이 진보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지만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 아무리 진보해도 인간의 ‘마음’의 모습은 그리 간단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설사 우주여행을 하는 날이 와도 인간이 인간인 한 옛부터 이어온 ‘마음’을 잃는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일본 민예관에서 나는 먼 옛일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형과 처음 만났을 무렵, 서울의 어디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작고 낡은 목조 2층으로 된 교회에 안내해 준 일을요. 그리고 “여기는 일본 사람이 살고 있었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친구여”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투른 일본어였지만 뜨거운 마음이 전해지는 대화였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금 야나기 무네요시를 화제로 삼으면서 조선민예 컬랙숀을 보기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크나큰 기쁨이었습니다.
형이 귀국한 후 나는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의 사료관(史料館)에 갈 기회를 가졌습니다. 잡지<시라카바>의 창간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발간(發刊)당초는 ‘학습원의 도령님들의 심심풀이’ ‘시라카바’를 거꾸로 읽으면 바가라시(바보스럽다는 뜻)‘ 등등 경시(輕視)당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문예지 그리고 미술지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야나기는 클래스메이트와 둘이서 <토엔>이라는 회람잡지를 만들고 있어 <시라카바>의 창간에 참가 합류한 것입니다. 유소년기의 데생도 전시되어 미의식의 두드러짐을 보여 주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민예운동에 열중시킨 근원이 조선의 예술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둡고 슬픈 환경에 있어서도 순수한  ‘마음의 미(美)의 창’을 통해 이조잡기(李朝雜器)를 바라본 야나기에게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바칩니다. 또 한 사람, 야나기의 동지인 아사카와라는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서울의 망우리에 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꼭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인데, 일한사전에 ‘코코로(心)’를 찾아보면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라면 Heart 라든가 Mind 겠지만, 이것은 어딘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어니 해도 ‘마음’이 ‘코코로’와 딱 들어맞는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즉 진정으로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장에 ‘코코로(心)’가 빈번히 나와 있는 것도 ‘조선의 마음’과 서로 통했기 때문이지요.
두서없는 편지가 되었지만 뜻만은 새겨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겨울을 이겨내고는 기운을 돋우어 형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럼 다시 만날 그 날까지 형도 건강하기를 빌며…… (정종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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