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김 순 배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오늘날 가히 ‘서양음악의 승리’로 평가받는 불후의 걸작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운명은 바흐의 다른 것들이 종종 그러했듯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손으로 기록했던 ‘필사본’도 손에 꼽을 정도여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묻혀버렸던 작품이었지요. 작곡가 사후에도 70여 년간은 철저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19세기 초반이 지나서야 첫 공식 인쇄본이 나오게 되면서 비로소 이 첼로 모음곡은 조금씩 빛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재발견된 이후에도 이 작품은 연주회용 레퍼토리라기보다는 단순히 첼리스트들을 위한 연습곡이나 학생 교육용 교재 정도로 치부되었었지요.
1900년이 넘어서면서 비로소 이 곡은 하나의 예술작품 혹은 연주회용 레퍼토리로서 실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여기에는 불세출의 첼로 명인 파블로 카잘스(Cazals)의 공이 결정적입니다. 1889년 당시 13세의 소년이었던 카잘스가 바르셀로나의 중고용품 가게에서 이 악보를 발견한 이후 바흐 첼로 조곡의 운명은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이 곡을 곧바로 무대에 올려 연주하는 대신 30년 이상의 세월을 작품을 연습하고 다듬는 일에 전념합니다. 텍스트가 품고 있는 정밀한 디테일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 각고의 공을 들인 것입니다. 첫 발견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2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카잘스는 전 곡을 녹음하는 음반작업에 착수합니다. 그 동안 그가 기울인 노력과 열정은 거의 창작에 버금가는 종류의 강도 높은 것이었지요. 카잘스의 녹음 이후 오랫동안 두터운 먼지에 가려져 있던  보석이 드디어 그 광채를 드러내듯 이 위대한 첼로의 걸작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형상과 내용으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작품이 거쳐 온 이 같은 경로만 보더라도 바흐의 첼로조곡이 시간의 테스트를 충분히 통과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 150여 년간 첼로를 배우거나 연주하는 모든 이들은 이 작품을 연습용으로라도 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서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첼로 독주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적 촉매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해 준 작품이 바로 이 바흐의 무반주 조곡입니다.
여기서 ‘조곡(Suite)’이란 여러 가지 다른 스타일의 춤곡들을 모아 만든 작품을 뜻합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통해 정형화된 춤곡들은 바흐의 손에 의해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음악형태로 승화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작품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첼로라는 악기를 위한 작품이 원래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바이올린처럼 어깨에 대고 연주하는 첼로의 전신(Cello da Spalla)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원래 이 작품이 의도했던 악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흐의 많은 걸작들이 그러하듯 이 모음곡도 무수히 많은 매체로 편곡되고 연주되어 왔습니다. 바이올린, 비올라, 더블 베이스, 비올라 다 감바, 만돌린, 피아노, 마림바. 클래식 기타, 리코더, 프렌치 혼, 색소폰,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트롬본, 튜바 등 다양한 매체들이 바흐의 첼로 고전을 흠모하여 자신만의 매체로 옮기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곡은 첼로와 그와 비슷한 현악기를 위한 것이었고 그 악기를 위한 레퍼토리로는 지존의 자리에 있는 모음곡이지만 다른 매체로 번안되었을 때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임펙트(impact)를 가지는 바흐 음악의 신비는 과연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여섯 개로 구성된 이 모음곡에는 상상할 수 있는 첼로의 모든 테크닉이 망라되어 있고 하나의 악기를 통해 구사 가능한 표현의 반경이나 범위 또한 그 방대함을 자랑합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오직 바흐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생한 음악적 교감이나 상호작용이 매우 밀도 높게 전개되고 있지요. 애초에 바흐가 왜 이 솔로 첼로를 위한 곡을 만들었는지 진짜 이유는 그 자신의 친필 악보도 남겨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파악하기 힘듭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공중의 주목을 어느 정도 받았던 작곡가들과는 달리 바흐의 경우 작품에 얽힌 미스터리들에 대한 해명 자료가 충분히 남아있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가 당대에 그다지 주목받는 작곡가는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의 위대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주목이 미미했던 이유 중 하나라면 그가 오페라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 탓도 있습니다. 그가 살고 활동했던 18세기 초반은 가히 오페라의 전성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흐가 일하고 살았던 독일 중소도시들에는 당대에 선풍을 일으켰던 오페라 전용 극장인 이른바 ‘오페라 하우스’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바흐가 오페라를 작곡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지요.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그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장르, 특히 교회음악의 영역에 집중할 수 있었고 오늘날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 분야의 명곡들을 풍성하게 남길 수 있었겠지요.

현악기를 위한 그의 또 다른 명곡으로는 ‘바이올린을 위한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가 있습니다. 그 작품도 물론 빼어나지만 바이올린과는 또 다른  오로지 첼로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깃든 소리로 깊은 사색의 경지를 열어 보이는 작품이 바로 무반주 첼로 조곡입니다. 이 곡의 형태를 구성하는 춤곡들의 모음은 당대의 궁정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기곡들이었지요. 하지만 단순한 ‘엔터테인(entertain)용’ 춤곡들이 바흐의 손에 의해 재탄생되면 거의 종교음악과 같은 심원한 경지를 맛보게 해준다는 데 이 조곡의 특별한 가치는 자리합니다.
바흐로 말하면 어떤 장르를 새로 만들어내고 개척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그 때까지 존재하던 기존의 장르들을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형태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완성자의 모습을 지닌 인물입니다. 독일 태생 작곡가로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스타일까지 모두 소화 흡수시킨 그는 형식적 균형미와 내용의 풍부함과 깊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무반주 첼로 조곡에도 이 모든 다양한 요소들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바흐의 손을 거쳐 나온 첼로는 이미 예전의 보조적인 악기가 아닌  위대한 솔로 악기,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현악기의 지존으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범용한 연습곡으로 묻힐 뻔도 하였던 무반주 모음곡이지만 그토록 진지한 영감으로 가득 찬 매력적인 연습곡은 연주하는 첼리스트뿐 아니라 곁에서 그것을 듣는 이들의 영혼을 강렬하게 사로잡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 위대한 영웅 마하트마 간디(Ⅱ) - 그의 원체험(原體驗)과 사상 - 성서와 문화 2010.12.27 2458
31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서와 문화 2010.12.27 2126
30 산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과 성서와 문화 2010.12.27 2348
29 하찌우마(八馬理) 선생님 성서와 문화 2010.12.27 2421
28 만년晩年의 광경, 추억 한국의 벗에게 띄우는 편지 성서와 문화 2010.12.27 2156
27 마魔의 벽을 넘고 있는 그릇 - 도예가 이종수의 세계 - 성서와 문화 2010.12.27 2321
» 음악 片紙 ⅢⅩⅥ 영혼을 사로잡는 ‘연습곡’ 성서와 문화 2010.12.27 2090
25 시인詩人과 설교자 - 보는 사람, 볼 수 있게 하는 사람 - 성서와 문화 2010.12.27 2080
24 공주의 조팝나무 성서와 문화 2010.12.27 2420
23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Ⅰ)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4 2617
22 한국적 통섭(通涉), 일명 함(含)의 신학 성서와 문화 2010.10.03 2124
21 미수米壽와 미수美壽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458
20 맑고 순수한 영혼의 노래를 그린 이 남 규 화 백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490
19 음악 片紙 ⅢⅩⅤ 책으로 엮인 음악편지 성서와 문화 2010.10.03 2331
18 나의 금강도金剛圖 - 고구려의 하늘 file 성서와 문화 2010.10.03 2441
17 역사의 자연화, 자연의 역사화 성서와 문화 2010.10.03 2467
16 난곡(蘭谷) 조향록 목사의 그 지극한 삶을 기억하며 성서와 문화 2010.06.25 2449
15 향기 나는 사람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435
14 빛으로 가는 길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349
13 장공(長空) 김재준의 ‘성령찬가’ file 성서와 문화 2010.06.25 2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