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이 문 균 ·신학

 

 

시를 통해 본 시인 그리고 설교자
시(詩)라는 글자는 말씀 言변에 절 寺자로 이루어졌다. 시(詩)란 언어로 지어진 사원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詩人)이란 언어로 사원을 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언어를 이리저리 쌓아 사원을 지어 놓으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세상을 새롭게 보고 경험한다. 설교자 역시 언어로 사원을 짓는 사람이다. 설교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느덧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시인과 설교자는 언어로 백성들의 미망을 깨워야 하는 예언자의 일을 해야 하는 동시에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효과적으로 말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사명을 깊이 인식할 뿐 아니라, 그 사명을 잘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설교자는 무엇보다 언어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시인처럼 언어의 장인(匠人)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언어를 빛나게 할 줄 알고, 그래서 그 빛나는 언어를 적절히 배치하여 듣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변화시켜야 한다. 그의 힘찬 말이 착한 이들의 가슴속에 시들지 않고 살아있게 해야 한다. 

 

보는 사람
시는 설명하고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시는 보여주고 상상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좋은 설교는 정의하고 논증하기보다 보여주고 상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잘 보여주기 위하여 시인과 설교자는 우선 잘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흔히 시를 쓰려면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가 될 만한 생각이나 느낌이 떠올라야 시가 써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감이라는 것을 시적 감동이나 감흥의 수동적 상태로만 이해하는 것은 시를 오해하게 만든다. 엄밀히 말해서 영감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어떤 시도 태어나지 않는다. 시의 영감과 그 표현 능력이란 본래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각고의 노력과 깊은 관심이 있을 때 ‘뮤즈’도 내려앉고 인스피레이션도 달라붙지, 덮어놓고 영감이 내리기를 기다려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설교자도 영감을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도 영감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영감을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다. 신문을 읽고,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영적 감동은 지각되고 선택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시인처럼 언제나 영감을 포착할 수 있는 상태 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시인처럼 우선 잘 보아야 한다. 회중이 잘 볼 수 있도록 설교하려면 설교자 자신이 먼저 잘 보아야 한다. 구약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말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본 것을 바탕으로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으며(렘 1: 11-13), 아모스가 설교자로 나섰을 때에도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셨다(암 7:8). 잘 보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은 설교를 이미지와 그림으로 가득 채웠으며, 그들의 삶 자체를 보여주면서 설교하기도 했다.
설교자는 시인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누구나 보는 별이지만 시인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고 이별일 수도 있다. 시인 윤동주는 별을 보면서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생각했다. 시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본다는 것이고, 새롭게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고정관념으로만 보아오던 세상을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다르게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 릴케는 습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은 모두가 그 사물을 죽이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시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깊이 꿰뚫어 본다는 말이다. 시인은 사회의 모순과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하여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떠밀려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사회의 밑바닥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어둠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는 모순과 슬픔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시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으로 자기 밖의 세상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다르게 표현하고, 새롭게 해석한다.
설교자도 시인처럼 보아야 한다. 일상적으로 가까이 하는 평범한 사물이라도 건성으로, 통념을 따라, 습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리하고 면밀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전에는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설교자는 삶의 뒷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시인처럼 삶의 이면에 가려있는 모순과 아픔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사물과 사건을 잘 볼 뿐 아니라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 본문으로부터 현실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얻어야 한다. 설교자는 시인과 달리 신앙적인 인식이 요구된다. 그러나 신앙적인 봄(인식)이 상투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설교자는 여전히 시인의 눈으로 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시인의 언어를 매개로 사물을 본다는 말도 된다. 시를 통해서 우리는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얻기 때문이다. 언어가 확장되어야 생각이 확장된다. 시인의 언어는 설교자의 사고와 시야를 확장시켜준다. 시인의 언어는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준다. 그래서 시인의 언어와 설교자의 신앙적인 인식은 설교자의 정신 안에서 서로 교류하여 설교자의 시야를 열어준다. 그래서 설교자는 세상과 성경 말씀을 그 전과 달리 새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볼 수 있게 된다.

 

볼 수 있게 하는 사람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는 ‘미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와 설교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보이게 해 준다. 시는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게 한다. 시를 읽으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일 뿐 아니라 시를 통해서 그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잘 볼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진정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언어(language)의 한계는 곧 우리 세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우리에게 그가 한 말(words)이 아니었으면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시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보게 하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둠을 볼 수 있게 하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해 준다. 시인이 말로 그렇게 표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 덕분에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시인이 한번 단어를 그 자리에 배열하면 우리는 이미 본 것을 볼 뿐 아니라, 우리의 시야가 신선해져서 그 언어가 아니었으면 놓쳤을 뜻밖의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모든 시인이 우리에게 볼 수 있는 언어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말의 능력은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현대 영국 시인 오든(W. H. Aud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키플링을 읽으면 흔히 ‘저것은 바로 내가 느낀 대로야’라고 말하지만, 대시인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전에는 내가 느낀 바를 한 번도 깨닫지 못했어. 그런데 고맙게도 이 시를 읽고 나서 이제부터 나는 달리 느끼게 될 것이야’라고 말하게 된다.” 오든의 말은 평범한 시인과 대시인의 차이를 지적해 주고 있다. 그의 말은 설교자에게도 해당된다.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 훌륭한 설교일까? 설교를 들은 회중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 설교는 잘 한 설교다. “오늘 목사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을 잘 말씀해 주셨어. 내가 평소에 믿고 있던 것을 목사님은 오늘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말씀해 주셨어.” 설교는 그런 반응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러나 회중이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 설교는 참으로 잘 한 설교다. “감사하게도 오늘 설교를 듣고 나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나 자신과 세상을 달리 느끼고 달리 생각하게 되었어. 이제부터는 그 전과 다르게 살 거야.”
시인 설교자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하려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하고 설명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를 자연과 일상적 삶에서 끌어내어 그 생생함을 통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셨다. 그 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5페이지에서 계속>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고, 볼 수 없었던 위기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언어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적절한 비유는 사물에 대한 상식적이고 습관적인 인식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열어보여 준다.
오늘의 설교자는 시인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어떤 문제나 사건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것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나 사건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기이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쓸모없는 비유, 상식적인 비유, 낡은 비유는 상상력과 이해의 빈곤에서 온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 회중들이 ‘바로’ 볼 수 있게 해 주려면 설교자는 하나님과 세상과 사람에 대하여 깊고 폭넓은 인식을 지녀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이 ‘잘’ 볼 수 있도록 언어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설교자는 시를 많이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말을 골라내고 확장하려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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