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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조팝나무

성서와 문화 2010.12.27 11:36 조회 수 : 2420

허 만 하 ·시인

 

 

박목월 시인이 생전에 펴낸 마지막 시집으로 『무순無順』(삼중당, 심상사 구성·1976)이 있다. 이 시집은 판권면에 5백부 한정판이라 밝혀져 있는 대로 시중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시집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권은 許萬夏氏 朴木月이란 잉크글씨 증정서명이 들어 있는 귀한 한 권이다. 펄펄 나는듯한 목월 시인의 필체가 살아 있는 이 한 권은 이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소중한 시집이다. 목월 시인은 이 시집을 낸지 2년 후에 별세하신 것이다.
겨울날 이른 아침이면 꿩들이 마을 앞까지 내려오곤 하던 경주의 건천 모량리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이 마을에서 직접 농사일(논이 십여 두락 밭이 몇 천평)을 하셨던 어머니를 위하여 『어머니』( 삼중당 1967)라는 독립된 한 권의 시집을 펴낼 만치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어머니는 40전후에 예수교에 입교하시어 어린 목월(아명 종이-박영종)을 세례 받게 하신 분이다.
시인자신이 남긴 글에 따르면, 이 산골 마을에 개척교회가 선 것은 목월 시인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고, 그 교회는 허술한 초가집의 방 한간을 빌어 20-3명의 교인이 모인 것이었다. 그 초가집 텃밭에 나지막한 종대를 세워 종을 달아놓은 것이 다른 초가집과 다른 모습이었다 한다. 성탄절이면 영종이는 벽에 예수 탄생의 크레용 그림을 그려 붙이고, 시골마을 외딴집을 찾아다니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는 것이다.
 
목월 시인에게는 생전에 낸 시집 『無順』에 이은 또 한 권의 시집이 있다. 미망인 유분순兪益順여사께서 목월 시인 사후에 내신 박목월 신앙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 서문은 목월 시인이 돌아가신지 7개월남짓 지난 후 이 시집을 엮은 부인의 글이다. 이 시집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연필을 깎아 시를 쓰실 그분에게 올릴 시집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목월 시인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상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다
 
새해를 맞을 때나 기일忌日을 맞을 때나 아이들의 생일生日을 맞을 때나 무엇이든지 크고작은 일이 있는 날이면 가족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살아가는 진정한 방향과 자세를 일러주시던 그 심정의 바닥에는 경건한 신앙심이 담겨져 있었고 이러한 신앙심이 이슬처럼 배여나와 신앙시信仰詩가 형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집 가운데의 한편 「성탄절을 앞두고」를 읽으며 나는 신앙의 내림을 생각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내외가
돋보기를 서로 빌려가며
성경을 읽었다. 눈이 오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작품 중간에서
 
올해 성탄절에는 성가대에 끼어
우리도 큰소리로
구주 예수 오셨네를 부르며 골목을 누벼볼까요.
 
라는 구절을 만난 나는 경주 모량리 골목을 누비며 찬송가를 부르던 어린 날의 목월 시인의 은빛 목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추억을 목월 시인 자신이 글로 남기고 있다. 이런 추억이 그 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돋보기를 쓰고 글을 읽는 노년에 문득 떠오른 것일까.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라 말했던 릴케의 말이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또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세계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일까.  목월 시인이 부르는 찬송가 목소리의 배경에는 근 40의 나이에 입교하신 목월 시인 어머니의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다. 목월 시인이 그렇게도 따르고 기린 어머니의 모습은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동리목월 문학관》에서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우리들 할머니의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진열장 안에는 목월 어머님이 붉은 언더라인을 그은 검은 가죽으로 장정되고 모서리가 헐어버린 성경 한 권이 엄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목월의 작품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으로 먼저 만나보았던 그 성경책이다. 목월의 어머님(박인재 여사-친정은 경주 보문 단지 입구의 숲머리 마을)과 목월 시인의 손때가 묻어 있는 바로 그 성경이다.
 
목월 시인이 공주출신의 규수를 맞이하여 혼례식을 올렸던 것은 1938년 5월 20일의 일이다. 목월시인이 아버님과 벗들과 함께 공주에 들어서면서 맡았던 것은 강렬한 아카시아꽃 향내였다. 공주제일교회에서 양목사의 주례로 혼례식을 올리기 하루 전날 신랑 박영종은 공주를 찾았던 것이다.
지난 초여름 나도 아내와 딸과 함께 공주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보았던 것은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아니라 길섶에 흐들어지게 피어 있던 조팝나무였다. 조팝나무는 대전에 들어서기 전부터 도로 기슭에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초여름에는 흰 꽃이 많이 핀다는 말을 나누며 우리들은 공주교를 건널 때 까지 따라오던 조팝나무 흰 색을 바라보았었다. 공주산성을 감아 도는 공주천에서는 포크레인 몇 대가 하상을 파고 있었다. 공주산성의 숲은 멀리 바라보기만 했었다. 마침 점심을 위하여 들렀던 식당이 소고기국밥으로 이름나있는 식당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들렀던 집이란 사실을 문 옆에 붙어 있던 옛 신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목월 시인이 결혼식을 올렸던 공주(부인 유분순여사의 친정)를 다시 찾아보게 된 것은 첫 방문 이후 20년 남짓한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마침 문학강연회가 이 고을에서 있어서 부인과 함께 유서 깊은 공주를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공주가 가까워짐에 따라 부인은 소녀처럼 들떠 옛날 지명을 들먹이며 좋아했다. 스무살의 나이로 시를 쓴다는 경주 산골의 젊은이한테 시집온 이후 한번도 공주를 찾아보지 못했던 유분순여사로서는 당연한 흥분이었던 것이다.
옛날의 상반정(중동)은 6.25때 거의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여학교 때 은사 한 분(대추밭골 황선생)을 찾아보며 젊은 시절의 공주의 모습을 간신히 되살려보는 부인의 뜻을 목월시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내외가 모처럼 공주를 함께 찾아보았던 것은 4남 신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후 목월 시인이 공주를 다시 찾아보았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던 무렵 공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목월 시인에게는 공주가 다른 도시와는 다른 향기를 가지는 지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이란 우리들에게 단순한 지리학적 개념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우리들의 추억을  촉발하는 발화점이기도 하고 그 추억의 용량을 간직하는 창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날 개통된지 얼마되지 않은 서천-공주 고속도로를 타고 공주를 떠났었다. 목월 시인의 기억 속에서 중앙동 언덕 위에 서있던 서양풍 교회 건물을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서천 마량 포구 앞바다 풍경은 약간 우울한 그늘을 띄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이 지고 없는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은 그래도 장관이었다. 들머리에 앉아 공주 밤을 파는 행상도 어쩐지 추워 보였다. 이 포구가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들어온 곳이란 표식은 둘레 아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포구를 통하여 처음으로 들어온 성경책 한 권이 영남지방 경주 변두리 건천의 모량리라는 산골마을까지 찾아갔던 멀고도 험난했을 길을 상상하며, 우리는 걸음을 전주 쪽으로 옮겼었다. 어둠이 서서히 그 두께를 더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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