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이 정 배 ·신학

 

 

최근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제(學制) 간, 종교 간의 지경을 허무는 소위 탈(脫)경계적 노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런 경향은 진화 생물학자인 E. 윌슨(Wilson)의 <통섭(Consilience)>이란 책의 번역을 통해 촉발되었다. 주지하듯 이 책은 진화론의 틀에서 생물학, 윤리학 심지어 종교마저 하나로 통섭(通攝)하려는 야심찬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윤리와 종교의 의미 및 가치마저 유전자의 시각에서 보려는 환원주의적 입장으로 인해 긍정만큼 비판의 소리도 많다. 종교 간 경계는 물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장벽도 허물어져야 할 상황에서 통섭의 요구는 정당하나, 하나의 원리 더구나 유전자로 귀결시키는 논리 자체는 수용키 어려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정신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서구적 ‘통섭’(通攝) 대신 이원론적 토대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동양)적 ‘통섭’(通涉)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즉 앞의 通攝이 물질을 큰 줄기로 하여 일체를 그곳으로 귀결시키는 차원이라면 나중 ‘通涉’은 우주 만물간의 상즉상입(相卽相入-서로 널리 통함))의 구조를 언표하고 있다. 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만물의 실상은 ‘攝(섭)’이 아닌 ‘涉(섭)’이었고 한국 종교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풍류도의 포함삼교(包含三敎)의 원리와 다르지 않았다.
익히 알듯 오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치원이 발견한 한국의 도(道)는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풍류(風流)였다. 풍류는 중국에서 유입된 유불선(儒佛仙) 종교를 품어 안으면서도 그들 각자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힘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한국적 通涉의 실상을 보여주는 ‘含(함)’이란 개념이다. 이는 같은 음색을 지닌 ‘函(함)’과 전혀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까닭이다. 전자가 물속에서 소금이 녹아 소금물이 되는 경우라면 후자는 작은 상자가 더 큰 상자의 품속에 안겨 그의 일부가 되는 상태를 적시하고 있다. 즉 ‘含’이 실체를 脫하는 차원으로서 상즉상입의 실상을 보이는 반면, ‘函’은 불변적 실체개념으로서 반생명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통섭론(通涉論)은 지난 시기의 含의 논리에 의거 한국적 사유 원형을 재발견해내는 시도라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儒佛仙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아우른 風流道(體)의 用으로서 ‘含’은 서구의 환원주의적 통섭이론과 공존키 어려울 것이다.
이런 通涉, 곧 ‘含’의 논리는 조선조 거유(巨儒) 이이(李耳)의 ‘부성무물(不誠無物)’ 사상에도 깃들어 있다. ‘성(誠)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이 말은 본래 <중용(中庸)>의 한 구절인 바, 李耳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우주와 인간사(人間事)를 관통하는 일괄지도(一括之道)인 誠으로써 李耳 역시 유불선을 품은 것이다. 誠이 없으면 불교는 이치가 격(格)에 맞지 않고, 유교는 뜻(意)을 세울 수 없으며, 도교 역시도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誠’이 유불선의 존재 양식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 속에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誠은 현묘지도(玄妙之道)인 풍류와 본질에서 크게 다를 수 없다. 이 두 개념 모두는 일체를 자신에게 환원시키는 ‘큰 줄기’이기보다는 일체와 相卽相入된 우주만물의 실상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까닭이다.
이런 한국적 통섭(通涉)을 주장하는 정치생태학자 최민자는 이런 사유의 원형을 주저 없이 <천부경(天賦經)>에서 보았다. 본 책은 대략 9천여 년 전부터 환국(桓國)을 거쳐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져 내리면서 한국 역사의 정신적 중추가 된 최초의 경전이다.
<天賦經>속에는 <의식계 / 물질계>, <본체계 / 현상계>, <천리(天理) / 물리(物理)>, <숨겨진 질서(不然) / 들어난 질서(其然)> 간의 대립을 초극한 전일성(全一性)의 세계가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이런 양극성이 인간의 본성, 곧 성리(性理)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란 사실이다. 인간의 개체성이 본래 전체이자 관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치는 아직 현실태가 아니기에 인간의 부단한 자기 수행이 필요한 법이다. 수행 없이는 구체화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人中天地一(사람 속의 하늘과 땅이 하나이다)’의 세계인 까닭이다. 이로부터 일심(一心)이 通涉의 메카니즘인 것이 분명해 진다.
유물론적 通攝이 그랬듯이 지식(과학)만으로 학문 및 종교 간의 탈(脫) 경계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만물을 하나로 보는 ‘천균(天均)’의 상태, 소아(小我)를 잊는 좌망(坐忘)과 같은 의식의 확장이 더한층 요구된다.
“通涉의 기술은 다양한 지식 세계를 넘나드는 지식차원의 언어적 기술(Unity of Knowledge)이 아니라 아(我)와 비아(非我)의 두 대립되는 자의식을 융섭(融涉)하는 차원의 영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의식 확장을 통해 만유 속에 내제된 하나의 궁극적 본성을 깨치는 것이야 말로 通涉의 본령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세상을 달리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의식을 먼저 달리해야 하며 그림자를 바꾸기 위해선 실물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이유가 의식의 확장, 영적 진화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제도를 앞세우고 물질을 토대로 인간조건 및 세상 전체를 달리 만들려는 일체 논거는 학문적 의식의 서구화로서 通攝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런 通涉의 메카니즘을 지닌 한국적 신학자로서 우리는 다석(多夕) 유영모를 꼽을 수 있다. 그 스스로도 <天賦經>을 하늘에 꼭 맞닿은 글로서 하느님을 보증하는 말씀으로 여길 정도였다.
多夕이 通涉의 신학자인 이유는 본질, 현상 그리고 본질과 현상 간의 일치, 곧 삼재론(三才論)의 틀에서 하느님,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있음의 근거인 허공(없음)을 하느님이자 그의 마음이라 여겼으나 이런 하느님이 언제든 인간 밑둥(本性)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 多夕의 생각이었다. 본질이 현상이고 현상이 본질이란 상즉상입의 ‘함(含)’ 의 논리에 힘입었던 까닭이다.
多夕은 인간 ‘밑둥’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성령이라 했고 이를 ‘얼’ 또는 ‘얼나’라고도 불렀다. 인간 속에 ‘얼’이 존재하는 한 하느님 영(靈)의 단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적 삶을 살았던 예수 역시도 예외 없이 이런 하느님 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예수는 육체를 덧입었으나 탐진치를 벗고 자신의 얼나를 가시화했다. 예수의 몸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신성하게 여겼던 기독교 서구와 달리 탐진치를 벗기 위한 자사천난(白死天難)의 행위 곧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간의 通涉, 곧 체용(體用)의 일치가 성사된 까닭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특이성은 동시에 인간 모두의 지향해야 할 공통점이 되었다. 불교, 유교는 물론 일체 종교는 모두 예수가 품었던 귀일(歸一)의 열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열망이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십자가로 나타났듯이 이웃 종교의 고행(苦行),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역시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 歸一을 위한 방편인 까닭이다.
이처럼 십자가가 歸一을 향한 열망의 표현으로서 자속(自贖)의 길로 이해되는 한에서 多夕의 기독교,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의당 유불선과의 소통의 차원을 넘어 通涉을 이룰 수 있다. 多夕 자신도 유불선을 일컬어 하늘의 계시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라고 했으며 석가 공자를 비롯한 인간 모두를 결국 ‘하나’의 아들이라 했던 것이다. 예수만 아니라 하느님 씨앗 지닌 우리 역시도 독생자란 말이다.
주지하듯 현실은 기독교이후 시대가 되었다. 가치 다원주의가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규범처럼 인식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제약적 헌신을 하면서도 같은 열망과 헌신이 이웃 종교들 속에서 그들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신학적 원리가 긴급히 요청되고 있다.
기독교 서구가 제시한 종교다원주의 논리는 아시아 종교들을 만족시키기에 아직 역부족인 듯싶다. 자신들의 사고범주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누(累)를 아직 벗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점에서 한국적 通涉의 신학, 곧 ‘含’의논리는 서구 종교다원주의 제반 이론-신중심주의, 기독론 중심주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 多夕처럼 종교의 급진적 보편성을 강조하며 이웃 종교의 토대를 긍정하는 신학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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