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김 효 숙 ·조각

 

 

30대초 공주사범대학에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이곳은 나에게 소중한 만남들을 있게 한 곳이다. 그 만남의 중심에 이남규(李南奎 1931-1993) 선생이 계시다.
나는 사람을 믿고 아끼는 이 선생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고, 지금도 그 때를 되새기며 그리움에 젖곤 한다.

선생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 사람을 대하는 모든 일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이 모두가 하나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일그러짐 속에서 바르게 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겠는가. 선생은 신장이 좋지 않으셨고 이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셨다. 여러 차례의 입 퇴원을 반복해야했고 누님의 신장을 이식받는 대 수술을 받기도 했다.
교회에서 지인 몇이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선생은 쉼 없이 몸을 긁고 계셨다. 보기가 안스러웠다. ‘많이 가려우신가 보죠?’ 하고 위로하니 그 힘든 속에서도 “할 일 없이 누어 심심한데 이거라도 해야죠.” 하며 그분 특유의 낙천적인 유머와 여유로 오히려 위문 간 우리를 웃기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곁에서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게 간호하고 계신 사모님을 뵈며 두 분의 인품과 신앙에 늘 감명 받곤 했다.
언젠가 지치고 힘들어 선생을 찾아가 이런 저런 푸념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 두툼한 책 한 권을 내게 내 주었다. 미술사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낮선 여성작가의 화집이었다.
주로 단순한 연필 선으로 그린 인물화와 수채화들이었다. 이런 것을 왜 보라고 주실까 궁금해 하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 가다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용해지고 평화로워져 갔다. 그녀의 그림은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성실하고 서둘지 않는 차분함 속에 작가의 따뜻한 눈길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어떻게 작품을 대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선생이 말해 주고 싶었던 말들을 선문답(禪問答)처럼 얻었다.

선생의 그림은 하나를 향한 끊임없는 도 닦음의 도정(道程)이었다. 선생은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 밭을 갈러나가는 일상처럼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했다. 신이 당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준 자신의 원형을 의심 없이 믿고 거기에 뭍은 군더더기를 제거하여 질서에 맞는 것만을 남겨놓는 일, 이것이 그림 그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티끌 없이 영롱한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 아이처럼 신이 나고 그 속에서 기쁘고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그림을 통해 그가 바라는 하나에로 더 가까이 다가 가고자했다.
그의 그림에는 망설임이 없다. 다양한 붓놀림은 하나같이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다. 바람처럼, 폭포처럼, 때론 잔잔한 시냇물처럼 흐른다.
막힘은 생명이 아니다. 숨 쉬고 춤추며 색채는 자유롭게 화폭을 누비며 노래한다. 그 노래 소리는 우주의 넓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과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따듯한 가슴을 갖게 한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은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얼른 남의 눈에 잘 띄지 않겠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다. 순수한 영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흘러 우리의 삶을 자유와 평화와 사랑으로 이끈다.
이남규 선생의 작품이 그러하다. 그의 색채는 맑고 깨끗하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보는 이를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다. 결국 작품은 그 그린 사람을 닮는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행복해져 있음을 느낀다.
선생이 그림의 재료로 쓰는 것들은 캔버스와 유화물감 등 다양한 서양의 화구가 주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 있는 화면구성과 붓놀림은 동양예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백을 살린 많은 구성과 붓의 사용은 그대로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붓의 여러 가지 활용법 즉 붓에 힘을 주었다 뺏다, 들었다 놓았다, 밀었다 당겼다하며 선의 굵기와 모양을 내는 것,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진하게 하거나 갈필(渴筆)로 빡빡하게 붓이 갈라지게 하는 등의 표현 방법들은 모두 동양화를 그리거나 서예를 쓸 때 사용하는 기법들이다.
그의 그림의 틀은 서예의 초서에 있다 한다.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상형문자가 점점 단순화 되어 그 필획을 간략하고 빠르게 흘려 쓴 글체가 초서이다. 따라 초서는 사물의 형태로부터 자유롭고 유연하여 흐르는 물과 같이 글자와 글자를 구별하지 않고 연결되어 융합한다. 너와 내가 떨어져 있지 않듯이 함께 있으며 그것들이 어울림을 만든다.
그의 그림에 구성과 색은 있으나 특별한 형태는 없다.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하다. 나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그림에서 시적이고 음악적인 느낌을 갖는데 이 선생에게서는 수화 보다 더 자유롭고 유창하며 역동적인 모습으로 동양적인 멋과 시가 담긴 음률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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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캠버스나 종이 등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많은 유리화(Stainedglass)를 남겼다. 오색의 빛으로 하나님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선생의 신앙과 예술을 표현하기에 가장 걸 맞는 소재였으리라 생각된다. 선생은 단순히 색유리 조각을 연결하여 그림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유리 위에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고 하며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듯한 유리화를 만들었다. 여기서 생기는 강한 붓 텃치에 선명하고 강한 색채가 더해져 그 표현은 더욱 풍성하다.
평시 추상화를 주로 그린데 비해 유리화에서는 성서적인 주제로 구상적인 형태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하늘을 향한 맑고 투명한 사랑의 노래이다. 그의 기도가 아름답게 형상화된 빛나는 유리화가 45곳에 이르는 성당에 남겨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간결하고 자연스러우며 꾸밈이 없어 어린아이의 장난 같다고 했다. 예술작품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타고난 예술가의 예술행위는 놀이라는 것이다.(遊戱三昧) 이 선생은 의도적인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구도와 색채에서 자연스러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가르침처럼 잘되고 못되고를 염두에 두고 꾸미지 않는 것이다.(不計工拙) 나는 이 선생의 그림에서 그 천진스러운 놀이와 자신만의 화법을 본다.

선생은 말년 하루에 10~12시간씩 그림에 몰두하다 과로로 쓰러지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들이 솟아져 나올 때였다. 몇 년 만이라도 더 그림을 그리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2003년 평창동 가나화랑에서 선생님의 10주기 추모전이 있었다. 새롭게 다시 대하는 작품들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색채 뒤에 숨 쉬고 있는 그 분의 순수한 영혼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큰 감동이었다.
작품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간 흔적들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우리의 가슴에 박혀 다시 우리를 자유와 기쁨의 행복한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가고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사랑의 열매들은 오래 오래 우리 곁에 남아 따듯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선생을 통해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신앙의 길 그리고 교육자로 또한 참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며 이 귀중한 만남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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